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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쓰는 사람들: 『이 모든 괴로움을 또 다시』

2025. 8. 31.

··· 언제나 생각나는, 그리고 언제나 그리운 ‘나의‘ 도시는 내가 만 4년을 살았던 뮌헨이고 그 중에서도 내가 만 3년을 기거했던 뮌헨의 일구(一區) 슈바빙이다.

슈바빙에서처럼 내가 자유로운 느낌으로 숨을 쉬고 활보할 수 있는 장소는 아마 세계 아무 데도 없을 것 같다. 고향 도시인 서울은 더구나 그것과는 거리가 있다. ··· (본문에서)

『이 모든 괴로움을 또 다시』는 2002년 민서출판에서 펴낸 전혜린의 두 번째 일기서한집입니다. 초판은 전혜린이 작고한 지 3년 후인 1968년에 출간되어 2002년 재출간된 것을 마지막으로 현재는 중고 도서와 전자책으로 구해볼 수 있습니다. 민서출판은 전혜린의 사후에 에세이를 두 부류로 나누어 발행하였는데, 그 중 첫 번째는 전혜린의 딸 정화를 키우며 쓴 육아 일기로,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라는 이름으로 출판되었습니다. 책 제목의 ‘이 모든 괴로움을 또 다시’는 전혜린이 탐독했던 니체의 어구를 따온 표현으로 보입니다. 출판을 염두에 두고 쓰인 글이 아닌, 삶의 박자에 맞춰 더불어 쓰인 정직하고 고독한 기록이기에 글을 읽는 독자로서는 어렴풋이 전혜린이 속했을 풍경과 온도의 심상을 저절로 그려보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일기의 배경 뮌헨, 그중에서도 슈바빙(Schwabing)은 독일 바이에른주의 주도 뮌헨에 있는 자치구로, 시 자치구 4의 슈바빙-웨스트(Schwabing-West)와 시 자치구 12의 슈바빙-프라이만(Schwabing-Freimann)의 일부입니다. 보헤미안적 분위기를 풍기는 예술가들은 슈바빙의 레오폴드 거리(Leopold Straße)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며 교류하였고, 이 거리는 이후에도 1960년대에 들어서 학생이 주도했던 68운동이 개막하는 무대가 되었다고 전해집니다. 지금의 슈바빙은 젠트리피케이션의 영향으로 임대료가 치솟아 국제적인 명성까지 얻었던 파티 지구로서의 명성은 찾아보기 힘든 풍경이지만, 여전히 북부 슈바빙에는 뮌헨 공과대학(TUM)과 뮌헨 미술대학교(AdBK), 그리고 전혜린이 유학한 루트비히-막시밀리안 대학교(LMU)가 자리 잡고 있어 자전거를 타고 다니거나 맥주를 마시는 학생을 쉽게 마주칠 수 있습니다. 루트비히-막시밀리안 대학교의 경우, 본래 잉골슈타트(Ingolstadt)에 설립되었던 잉골슈타트 대학교가 1826년 바이에른 국왕 루트비히 1세가 뮌헨으로 소재지를 옮겨오면서부터 그 자리를 지켜왔으니, 슈바빙은 지금의 뮌헨을 생장하게 한 심장부이며 근거지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슈바빙의 명소로는 영국 정원(Englischer Garten)이 있습니다. 뮌헨의 중심부터 북동부까지 넓은 규모로 뻗어 있는 영국 정원은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공원 중 하나로, 18세기 중반부터 19세기 초반까지 영국에서 유행했던 스타일을 본떠 조성되었기 때문에 그 이름을 갖게 됩니다. 일기의 본문에 따르면, 전혜린은 허무를 잊기 위해, 또 동시에 육체에 신선한 공기를 불어 넣기 위해 영국 정원에 따라 난 길을 걷고 산책했던 것 같습니다. 그녀에게 슈바빙은 젊음과 활기로부터 오는 자유, 때로는 햇빛이 모자른 독일 겨울의 공허함을 모두 안고 살아갈 방법을 깨닫게 해 준 도시가 아니었을까요.

이 글의 소제목으로, ‘뮌헨의 프로필’이라는 전혜린의 표현을 그대로 빌려왔습니다. 서울로 돌아온 전혜린이 두 땅을 딛고 선 발자국 아래로 언제나 자기 영혼의 뿌리를 뻗어 내렸던 그 땅, 슈바빙을 그리워했던 것과 그곳의 기운을 늘 기억하고자 했던 것은 이러한 이유가 아니었을까 추정하며.

일기는 1958년 10월 15일 자로 시작합니다. 여름과의 작별과 함께 맞이한 깊어지는 가을에 대한 짧은 탄식이 사과와 배, 레기나 포도를 파는 뮌헨의 시장 풍경에 차차 군밤 장수가 더해지리라는 변화를 예정합니다. 석탄으로 집의 난로를 데웠던 시절, 낯선 땅과 낯선 도시에서 남편 김철수와 함께 살았던 집 안 풍경은 고스란히 일기의 배경으로 자리합니다. 이듬해 1959년 3월 13일, 출산을 위해 대학병원에 입원하고 난 후부터 시간은 잠시 멈추었다가, 1961년 1월 1일, 새해인 동시에 그녀의 탄생일로 다시 옮겨 출발했습니다. 일기의 마지막 장에서 전혜린은 독일에서의 생활을 마치고 서울에서 강의와 강연을 하며 살아가는 삶에 관해 쓰고 있습니다. 이 책에는 1958년부터 1965년까지의 추려진 일기와 전혜린을 기억하는 이들—알핀 바이올렛, 한무숙, 김남조, 박인수, 이어령—이 남긴 글이 부록으로 함께 실려 있습니다. 한국어, 프랑스어, 독일어, 일본어가 섞인 본문은 구간마다 한국어로 번역이 되어 있고, 도중에 종종 작은 낙서며 그림이 등장합니다. 책에는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작고 이후 전혜린의 친애하는 벗이자 동료였던 자유기고가 이덕희는 전혜린에 관한 평전으로 1990년 『전혜린이야기』, 2003년 『전혜린』을 출간하며 그녀를 기렸습니다. 죽은 자의 글을, 죽은 자의 삶에 대해 말하고자 했던 이덕희의 시도가 전혜린 유족의 의견과 상충하였던 탓에 출판에 종종 어려움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전혜린은 여러 문학 작품에 몰두하는 데 열정을 쏟았습니다. 그녀의 일기에는 이들을 하나씩 호명하고 독백하는 듯한 목소리가 들어 있습니다. 독일의 정신분석학자이자 작가였던 루 안드레아 살로메의 『볼가강(Wolga)』, 체코슬로바키아계 독일인 문학가의 루이스 퓌른베르크의 『울기는 쉽지』, 러시아 극작가 블라디미르 마야코프스키의 『전쟁과 평화/나선피리/인간』과 독일의 혁명가 로자 룩셈부르크의 평전을 유독 자주 언급하고 또 인용했습니다. 문학작품을 완전히 이해하고자, 때로는 통과하여 당대의 인물과 작품의 정수에 가닿고자 한 그녀의 의식은 글 속에서 완전히 생생하고 구체적입니다. 지금도 그녀가 어떤 인물과 어떤 작품 속에서 고뇌로 치닫는 마음을 정화하고자 했는지, 일기를 통해 그 간절함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1934년 일제강점기 시절에 태어나 1965년 31세의 나이에 작고한 전혜린은 대한민국의 수필가이자 번역문학가입니다. 전혜린이 번역한 작품으로는 에리히 캐스트너의 『파비안』, 루이제 린저의 『생의 한가운데』, 르포르타주 『안네의 일기』, 하인리히 뵐의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 등이 있으며, 이는 그녀가 1955년 뮌헨으로 4년여간 유학을 떠났을 당시 몰두했던 번역 작업의 결과물이기도 합니다. 이 글에서는 전혜린이 번역한 문학가 중에서도 특별히 보리스 파스테르나크(Бори́с Леони́дович Пастерна́к)와 이미륵에 관해 짧게 소개하려고 합니다.

‘파스테르나크의 계절에

나는 죽고 싶도록 피곤하다’ (본문에서)

보리스 파스테르나크는 러시아의 문학가로, 소설 『닥터 지바고』가 대표적입니다. 1890년 러시아 제국 모스크바, 피아니스트 로잘리야 카우프만과 삽화를 그리는 화가 레오니트 파스테르나크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일찍이 작곡에 대한 관심으로 음악에 몰두했습니다. 독일 마부르크(Marburg)로 유학하여 철학을 공부하였고, 고국에 돌아와 본격적으로 서정시를 발표합니다. 1958년 스웨덴 한림원에서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호명되었지만 『닥터 지바고』의 내용에 러시아 혁명을 비판하는 내용을 이유로 러시아 정부로부터 비판과 압력을 받아, 결국 수상을 거부했지만 추후 1989년 그의 아들이 대신 노벨 문학상 메달을 받았습니다. 전혜린은 <여권(Geleitbrief)>과 단편 소설 <툴라에서 온 편지>를 번역했다고 언급했습니다. ‘여권(旅券)’이라는 제목으로 미루어 보아, 해당 작품을 국내에도 번역된 자전적 에세이 <안전통행증>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이 글은 작곡가 알렉산더 스크리야빈(Alexander Scriabin)의 영향으로 파스테르나크가 작곡의 꿈을 꾸었던 유년 시절에 해당하는 1부, 마부르크에서 철학을 공부했던 청년 시절 2부, 러시아에 돌아와 문학에 몸담고 마야코프스키를 만났던 시기의 3부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일기의 파편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미륵은 1899년에 태어난 망명 작가이자 독립 유공자로, 독일에서는 Mirok Li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일제의 점거를 피해 상하이를 거쳐 독일로 망명한 그는 뷔르츠부르크와 하이델베르크, 뮌헨에서 대학을 졸업한 후 잡지 투고와 번역 작업을 이어갔으며, 『압록강을 찾아서(Der Yalu Fließt)』라는 독일어로 된 소설을 1946년 피퍼출판사(Pipper)에서 출간하며 화제가 되었습니다. 전혜린은 이 소설을 1959년 국내에 처음으로 번역하여 소개했습니다. 1948년에서 1950년까지 뮌헨 대학교에서 동양학부에서 한국과 한국문학 강의를 했던 이미륵은 반나치 저항 운동의 대표하는 백장미단 사건을 이끈 쿠르트 후버(Kurt Huber) 교수와 깊게 교류하기도 했습니다. 일제강점기와 나치 독일의 지배를 모두 경험한 이미륵은 뮌헨 근교 그레펠핑(Gräfelfing)에서 사망하였는데, 자기 작품을 죽기 전에 대부분 불태웠으므로 전해져오는 작품이 소수에 그칩니다. 이후 2019년 그와 쿠르트 후버를 기리는 기념 동판이 뮌헨의 쿠르트 후버의 이름을 딴 거리에 함께 세워졌습니다. 전혜린은 일기에서 <묘지 참배 — 이미륵 씨의 발자취를 찾아서>라는 제목의 글을 썼다고 언급하는데, 이 또한 국내에서 지금까지 전해지지 않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눈과 귀로 세상을 훔치고, 요동치는 지상의 균열을 나아가고자 하는 발걸음으로 잠재우고자 했던, 때로는 거리를 쏘다니며 생활에도 소홀하지 않았던, 권태와 허무를 문학의 열정으로 채우고자 소망했던 전혜린의 삶을 관찰할 만한 것으로 우리에게 아주 충분한 자료가 남아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지나간 삶을, 개인의 외로움을 정렬하고 조율하는 데 성공하지 못한, 안타깝게도 지면에 채 상륙하지 못한 미완성이라고 감히 여길 수 있을까요? 때로는 프랑스의 작가 콜레트(Colette)처럼, 심장에 늘 밝은 촛불을 켜고 고유한 자기 자신으로서 살아가고자 했던 전혜린의 자취를 추적하는 것은 그녀가 몰두한 무수한 작품과 작가를 돌아보는 일로써 채워져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이 글에 나온 책

전혜린, 『이 모든 괴로움을 또 다시』, 민서출판, 2002

전혜린,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2004

이덕희, 『전혜린이야기』, 예하, 1990

이덕희, 『전혜린』, 이마고, 2003

이미륵, 압록강은 흐른다

이미지 출처

(1) 전혜린의 사진 https://www.jsd.or.kr/?c=806&uid=24757

(2) 책 사진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27371&srsltid=AfmBOorDNCLW0zaEIoinkbiIG-wp1gVLs6_fSInTOOhMbQNpW7YbkgaL

(3) 책 사진 『이 모든 괴로움을 또 다시』,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27369&srsltid=AfmBOoo49pYVROtt0EShMkTEfvOqcyX-DoXUNTLjT05pyfIcdHVqqLhx

(4) 뮌헨의 슈바빙 https://www.muenchenwiki.de/wiki/Schwabing

(5) 파스테르나크의 초상 https://en.wikipedia.org/wiki/Boris_Pasternak

(6) 이미륵의 초상 https://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524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