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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사각지대-6
2025. 8. 18.
종이를 바라봅니다. 백색의 영역 위에 놓일 수 있는 가능한 사건들을 상상합니다. 숫자나 글자, 누군가의 사진을 마주칠 수도 있고, 혹은 우연하게 좋은 이야기를 발견할 때도 있습니다. 접혀있던 종이의 집합체가 한 독자와 만나 펼쳐지는 사건으로 책을 묘사한다면, 이러한 관찰은 단순한 은유가 아니기도 합니다.
If you look around a room or out of the window and list how many things fold,
You know the obvious thing is this sweater, my shirt, the collar is folded, the skin here on my eye (is folded),
If I talk to you or to the camera then the air is folding going into your ear,
Even the Galaxy is sort of wheeling around and you know folding itself over eons as it goes around,
Even DNA is folded, you and I are born from folding.
방 안을 둘러보거나 창밖을 내다보며, 접히는 것들이 몇이나 되는지 떠올려 보세요.
분명히 보이는 건 이 스웨터, 내 셔츠, 접힌 칼라, 그리고 내 눈가의 피부(도 접혀 있죠).
내가 당신이나 카메라를 향해 말할 때, 공기 역시 접히며 당신의 귀 속으로 들어갑니다.
은하계조차도 마치 수레바퀴처럼 돌아가면서, 수억 년에 걸쳐 스스로를 접어가고 있습니다.
DNA마저도 접혀 있고, 우리 모두는 ‘접힘’에서 태어났습니다. (한글 번역 필자)
(<Between the folds>. Vanessa Gould. Independent Lens. 2008)

미국의 감독이자 프로듀서인 버네사 굴드(Vanessa Gould)는 다큐멘터리 <Between the Folds>(2008)를 통해 종이접기(오리가미)를 현대 예술과 과학의 교차점에서 탐구했습니다. 일본에서 유래된 오리가미(Origami)는 오루(접다) + 카미(종이)의 합성어로, 종이를 자르거나 접착제를 사용해 붙이지 않고, 접기 만을 통해 이차원 평면을 삼차원의 조형으로 만드는 예술 행위입니다. 접힘의 형태가 복잡해질 수록, 기하학적 계산과 종이의 물성에 대한 깊은 이해를 필요로 합니다.
영상에 등장하는 크리스 팔머(Chris Palmer)는 'Shadowfolds'라는 독특한 섬유 접기 기법을 개발하였으며, 이를 통해 빛과 그림자의 상호작용을 활용한 예술 작품을 창조합니다. 그는 “종이는 한 번 접히면 그 행위를 기억한다”고 말합니다. 즉 이미 한번 접힌 종이가 다른 방식으로 새로이 접혔을 때, 그것은 여전히 이전의 접힘을 그 물성 안에 간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이 단순한 사실을 활용해 종이를 접고, 그래서 그의 창작물은 때로 이전의 접힘을 기억하고 그 형태로 되돌아 가려고 하는, ‘움직이는’ 종이가 되기도 합니다. 그 움직임 사이로 빛이 투과되며 그림자를 만들어냅니다. 즉 종이는 기록의 관점을 넘어서 그 물성 자체가 기억을 담고, 과거를 내포하며, 현재의 형상을 취하는 물질이 됩니다.

위 이미지 속의 책은 거대한 크기와 무게를 가지고 더 이상 넘겨보기 힘들어진 채로, 서점이나 도서관이 아닌 전시장에 진열되어 있습니다. 이 작품은 독일의 현대조각가 안젤름 키퍼(Anselm Kiefer)가 제작해 온 여러 책 조각들 중 하나로, 두 개의 거대한 강철 책장에 약 200권의 납으로 덮인 책들이 채워져 있습니다. 작가는 지식의 전수와 그 왜곡, 억압을 주제로 한 대형 책-조각 작품들을 제작해왔습니다. 이 책들은 일부가 빈 페이지로 되어 있거나, 이미지나 내용물을 담고 있더라도 다른 물질로 알아볼 수 없게 뒤덮혀있는데, 그 중에는 안젤름이 비행기를 타면서 찍어둔 여러 지역의 항공 사진을 프린트한 뒤, 각 페이지 사이에 검은 물질(흙, 타르, 납 등)을 가득 뒤덮어서 만든 책들이 있습니다. 안젤름은 이 작업의 제작 과정에 대해 “이건 껍질의 도서관이다. 지구의 표면들이 담겨있는. 겉만 훑고 지나가는 것들이 담겨있는 책과 그 책을 모아둔 도서관이자 또 사실은 그래서 아무것도 아닌 것”(<Anselm>. Wim Wenders. 2023)이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각각의 항공 사진이 해상도를 가지고 모습을 선명히 드러내는 것이 무의미해집니다. 그의 책은 이해되고 독해되는 본래의 역할을 상실하고 도리어 육중하게 물질화 되어버린 기억의 무게를 시각화합니다.
이 압도적인 무게감을 생각하다보면, 어린 시절 두껍고 묵직한 책을 보았을 때 그 내용을 알기도 전에 어딘가 귀중하거나 진지한 느낌을 받았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종이 한장은 피부를 베어낼 수 있을 만큼 날렵하다가도, 그것들이 모이면 압도되고 감동하거나, 때로 짐스러워지기도 합니다.

야드 바솀(Yad Vashem)의 기획 아래 세계 여러 도시에 설치된 Book of Names는, 홀로코스트 유대인 희생자들의 이름과 간략한 전기 정보가 기록된 대규모 도서입니다. 사람의 평균 신장보다 높게 설치된, 참혹한 정보 더미들 앞에 선 관객들이 찍힌 사진을 보다 보면, 그들은 적혀 있는 이야기에 열중하기보다 종이 자체의 육중함에 어찌할 바 몰라 조심스러운 몸짓을 보입니다. 그리고는 아주 천천히, 신중하게 책장을 넘깁니다. 완독이 불가능한, 헤아릴 수 없는 사건들과 빼곡히 적힌 이름들을 봅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에 의해 학살당한 유대인 희생자들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이스라엘의 공식 기관
책다운 것이 과연 무엇일까요? 저는 종이와 그것이 전달하는 이야기가 가지는 서로 다른 의미와 역할 사이에서 혼란하게 독서를 하거나 인쇄물을 만들거나 수집품에 가깝게 책을 사모으고 진열하거나 일상의 곳곳에서 서로 다른 형태의 책이나 출판물을 접하고 소비합니다. 이 물음을 불러 일으키고도 무색하게 만든 한 출판물이 있습니다.

영국의 현대미술가인 피오나 배너(Fiona Banner)는 창작 활동의 일환으로 자신의 출판 레이블인 The Vanity Press를 설립하였습니다. 이 레이블을 통해 그녀는 책, 조각, 설치물, 퍼포먼스 등 다양한 형태의 작업을 발표했으며, 2009년에는 스스로 ISBN을 부여받아 자신을 출판물로 등록하기도 했습니다. 이 맥락 안에서 책은 본래 정식 출판물, 즉 상업적 판매 가능성과 그것의 제도적 권위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던 사물의 역할에서 예술작품과 상업적 제품, 저작자의 경계를 실험하는 추상화된 개념으로 사용됩니다. 단일한 사물에 ISBN이 주어지고, 그 상품이 찢겨진 모습은 어딘가 부적절한 의아함을 풍기며, 단 한명의 구매자와 거래되는 모습, 혹은 영원히 거래되지 않고 전시되는 모습, 그렇게 읽혀지기보다 설치되거나 전시되고, 관객의 구어로 묘사되거나 회자되는 모습이 그려집니다.
이렇듯 책의 제본 방식과 그것의 형태, 종이가 가진 물성, 이야기의 독해 불/가능성, 혹은 그럴듯한 모든 조건을 벗어난 채 떠도는 수많은 합당한 사건들 사이에서, 그 접힘과 펼침을 따라 모습을 드러내는 이야기들을 상상해봅니다.
이미지 출처
(1) Matthias Giegher 삽화 Universitätsbibliothek Basel, AP V 31a, https://doi.org/10.3931/e-rara-16355 / Public Domain Mark
(2) 오리가미 https://worldorigamiday.org/between-the-folds-origami-documentary/
(3) 안젤름 키퍼의 책 조각 https://a1000mistakes.wordpress.com/2020/02/07/great-art-anselm-kiefers-lead-books-sculpture-of-85-89/
(4) Book of Names https://www.nytimes.com/2013/06/14/world/europe/new-exhibit-at-auschwitz-birkenau-honors-children-of-the-holocaust.html
(5) 피오나 배너의 작업 https://www.fionabanner.com/vanitypress/index.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