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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쓰는 사람들: 『실비아 플라스의 일기』
2025. 5. 25.
실비아 플라스. 그 이름만으로도 신화적인 아우라가 뿜어져 나온다고 말한다면 과장이 아닐 것입니다. 현대 영미 문학계의 가장 파격적인 로맨스를 장식한 주인공이자 부엌의 가스 오븐에 머리를 박고 스스로 삶을 끝냈다는, 사실적이기에 비극적인 에피소드는 때로는 그녀의 작품보다도 한층 돌출된 꼬리표이기도 합니다. 실비아 플라스는 생물학 교수였던 아버지와 문학 교사였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녀가 8살이던 때 아버지는 사망하였고, 이후 어머니와 동생 워런과 함께 성장기를 보내며 매사추세츠 노샘프턴의 스미스대학에 장학금을 받고 입학했습니다. 학업 성적이 우수해 늘 촉망받는 학생이었던 그녀는 첫 작품 <그리고 여름은 다시 오지 않으리 And Summer will not come again>을 발표하며 시인으로 데뷔했습니다. 정규 학기에는 학업을 이어가며 시를 쓰고, 뉴욕시의 ≪마드모아젤≫에서 객원 편집기자로 일을 하며, 방학에는 록아웃 농장과 호텔에서 고용되어 어떤 식으로든 창작하는 자아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고, 이는 추후 하버드에서의 서머 스쿨과 풀브라이트 장학금을 성취하는 결실로 맺어졌습니다. 실비아는 1955년 5월 스미스대학을 졸업하고, 꿈에 그리던 영국으로 건너가 케임브리지대학의 뉴넘 칼리지에서 교환학생 프로그램에 참여했습니다. 새 땅에서 만난 운명의 상대가 바로 그녀의 남편이자 영국의 계관시인(桂冠詩人, Poet Laureate) 테드 휴스입니다.
사후 출간되었다고는 해도, 이 일기는 기존의 자서전과는 완전히 다른 성격을 지닙니다. 따라서 학업 성취도를 향한 고독한 추구만이 내용의 전부는 아닙니다. 유년기를 지나 한 여성으로서 성숙해지는 과정에서, 그녀는 때때로 멈추어 서곤 가만히 자신의 욕망을 관찰했습니다. 실비아는 자기 자신에게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너무도 일찍이 잘 알았습니다. 시를 향한 충동과 그 충동의 실현을 위한 토대로서의 조건, 사랑을 향한 갈망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그녀는 그녀에게 대적할 역동적인 영혼을 찾는 데에도 아낌없이 몰두했습니다. 다른 여학우들과 함께 지내던 기숙사의 다락방에서, 파티에 신고 나간 스타킹을 빨아 널어놓으면서, 유력한 잡지사에 원고를 송부하고 결과를 기다리는 장면은 단순히 순간들을 향한 ‘묘사’에 그치지 않습니다. 일기는 미국 스미스대학 시절과 영국 케임브리지대학 시절, 이후 보스턴과 영국에서의 시절을 지나 그녀의 죽음 직전 혹독한 겨울까지로 끝이 납니다.


다양한 공책이며 종이 다발의 형태로 남아 있는 그녀의 일기를 모아 엮은 책은 테드 휴스로 인해 실비아 플라스의 사후 23년 후인 1986년에 출간되었습니다. 공동 편집자 프랜시스 매컬로와 함께 실비아 플라스의 일기를 편집하여 출판하도록 결정한 것입니다. 실비아가 사망하고 난 후 묵묵히 입을 닫고 있던 테드 휴스는 또한 암 투병을 하던 시기에 실비아의 존재를 내포하는 시를 담은 시집 ≪생일 편지 Birthday Letters≫를 내기도 했습니다. 테드 휴스의 외도가 그녀를 죽음으로 내몰았다는 당시의 인식에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던 그가 시로서 다시 응답한 일이기도 합니다.
국내에서는 2004년 번역, 출간되었던 이 책은 출간 20주년을 기념하는 새로운 표지와 함께 그녀의 존재를 상기합니다. 총 720쪽의 일기는 가장 처음으로 발표되었던, 원본의 3분의 2가량을 생략하고 배제한 채로 편집된 초판본을 저본으로 삼은 동시에, 추후 2000년에 발표된 ≪완판 실비아 플라스의 일기 The Unabridged Journals of Sylvia Plath≫를 역시 일부 포함하고 있습니다. 테드 휴스에 따르면, 실비아 플라스의 마지막 일기는 죽음으로부터 3일 전까지 기록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망각은 생존의 필수 조건’이라는 명목하에, 그리고 테드 휴스의 결정으로 최후의 마침표가 된 일기 한 권은 자체적으로 폐기되었다고 전해집니다. 편집자 매컬로 역시 그녀의 사적인 영역에서 여전히 삶을 살아가고 있는 생존자들의 이야기와 성적인 에피소드에 관한 언급을 의도적으로 편집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합니다. 실비아 플라스의 전체 일기는 그녀의 모교이기도 한 스미스대학의 닐슨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일기의 출간은 불특정 다수인 대중이 행사할 수 있는 관음적 시선을 그녀의 작품뿐만 아니라 그녀의 삶까지도 가닿게 했습니다. 가공된 서사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극적으로 펼쳐진 실비아 플라스의 삶은 그녀가 직접 직조해 낸 멜로 드라마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작품들의 자전적 성향을 고려했을 때, 일기를 출간한다는 결정은 실비아의 세계가 생동하고 분출하는 뼈와 피로 구성되었음을 한층 더 투명하게 드러냈습니다. 이 선택은 평단과 대중에게 각인된 비극적인 서사가 다시 한번 더 파헤쳐질 수 있도록 내버려둔 것일 수도 있고, 혹은 더 정확한 방식으로 이해될 수 있도록 기회를 준 것일 수도 있습니다.
“사랑은 훗날 전능하고 옳은 신들이 아니라 꽤나 평범한 교외의 초라한 부부라는 게 밝혀지고야 마는, 본래의 친부모 자리를 대체하고자 하는 필사적인 구조물이다.” (본문에서)
어느 여름날의 나른한 오후, 체리 파이에 잔뜩 얹어진 생크림처럼 유혹적인 순간들에 관하여 실비아는 썼습니다. 때로는 외과의사처럼, 문제가 되는 환부를 검사하지만 치료라는 목적과는 어긋나는 태도로 자신의 모순된 욕망을 바라봤습니다. 그러니 그녀는 여느 목공처럼 그것을 결합하며 그럴듯한 형태며 결과물로 만들어내기보다는, 있는 그대로 장기마다 뜯어내어 피를 흘리며 나열하기를 선택하는 작가에 가까웠습니다. 배고픔에 시달리는 욕망에 가장 맛 좋은 빵을 건네주고 싶은 주체적 자아는 그녀의 목소리로 나타났고, 순백의 욕망을 갖고자 하는 청교도적인 자아는 이따금 그녀의 옷깃이며 손짓을 붙잡았습니다. 이렇게 용솟음치는 아이러니는 절박하고, 과시에 섞여 있는 적나라한 정직함은 새파랗게 곤두서 본체의 정신을 갉아먹거나 작품으로 재탄생했습니다. 몇몇 작품은 일기와 연동하여 구축되었습니다. 자살하기 직전 한 달 동안, 그녀는 마치 계시를 받은 사람처럼 추후 유고시집 ≪에어리얼 Ariel≫에 실릴 서른 편의 생동하는 시를 써냈다고 합니다.
걷잡을 수 없는 상징적 존재로서 부풀어 오른 이름, 실비아 플라스는 죽음 이후에도 여러 방면으로 뻗어나갔습니다. 일기의 사후 출간에 멈추지 않고, 영국 BBC는 당시의 스타 배우 기네스 펠트로를 캐스팅하여 그녀의 삶을 영화로서 재조명했습니다. 실비아 플라스의 딸이자 역시 시인이었던 프리다 휴스는 일찍이 할리우드의 영화화를 위한 시도를 꺼려왔기에, 이에 대한 심경을 시로 적어내기도 했습니다.
실비아 플라스는 때로는 헤픈 여자가 되어버린 밤을 지새고 수녀 같은 격한 열정으로 글을 썼습니다. 제 몸에서 잉태된 시를 쓰며 살아가고 싶었던, 그것을 위해 어떤 일이든 불사하겠다는 용기며 들끓었던 욕망이 페이지를 넘길수록 특유의 연쇄되는 수사법과 함께 진하고 강렬하게 쏟아져 나옵니다. 요절한 천재 시인이라는 아우라의 뒷면에 그녀가 열렬히 애독했던 버지니아 울프와 D. H. 로렌스가 중첩되기도 합니다. 한편으로 실비아라는 인간이 지니는 평범함은 시인으로서 성공 가도를 달리지 못할까 느끼는 두려움, 욕망과 일상의 양립을 고민하는 지점에서 여실히 드러납니다. 실비아가 기꺼이 뻗어나가고자 했던 시를 쓰는 인간으로서 길의 형국은 단순히 삶의 종결법만을 두고 형로(荊路)라고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그녀의 일기를 읽는 행위는 따라서 협곡이자 아우토반이자 레드카펫이자 은하수인 경로를 횡단해 씨앗에서 발산의 현장으로 건너오는 경험일 것입니다.
이 글에 나온 책
실비아 플라스, 『실비아 플라스의 일기』, 문예출판사, 2024
이미지 출처
(1) 실비아 플라스의 일기(Sylvia Plath. Autograph journal, 1950-1953): https://www.smith.edu/libraries/libs/rarebook/exhibitions/conway/plath.htm
(2) 실비아 플라스의 사진: https://poets.org/poet/sylvia-plath
(3) 실비아 플라스와 테드 휴스의 사진: https://www.britannica.com/biography/Sylvia-Plat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