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s

책의 사각지대-3

2025. 5. 10.

사물로서의 책, 그 공간을 주축으로 숨은 각을 발견하는 세번째 이야기입니다.

책은 평면의 종이 위에 글을 새기며 시작되었습니다. 낱장의 평면이 쌓여가며 세계를 담고자 했던 이야기의 집합이었죠. 그러나 책이 물리적인 부피를 획득하고 사람의 손을 타는 촉각적 경험이 쌓이면서, 단순한 글자의 기입과 전달을 넘어선 유연성을 획득하게 되었습니다. 페이지는 접히고 겹쳐지며 움직이기 시작했고, 책은 손 안에서 작동하는 물건이 되었습니다. 이곳에서 정지된 평면은 조작과 탐색을 허용하는 입체적 공간으로 변모합니다. 책이 사물로서, 그리고 도구로서 길을 열어가는 순간들의 몇 가지 예를 따라가보려고 합니다.

볼벨 — 조작 가능한 평면, 회전하는 지식의 구조

15세기 천문학 서적 속에서 처음 발견되기 시작한 볼벨(volvelle)은 종이의 평면성을 전제하면서도, 그 평면을 능동적으로 조작하도록 설계된 장치입니다. 축을 중심으로 겹겹이 포개진 종이 원판들은 독자가 손으로 돌려가며 원하는 정보를 획득하는 물리적 개입을 필요로 하기 시작했습니다. 사용자는 이 움직임을 통해 해와 달의 위치를 계산하고 별자리의 흐름을 읽고 자신의 운을 점치고 세상에 질의하기 시작했습니다. 볼벨은 단순히 기입된 텍스트나 기호를 넘어, 조작을 통해 의미를 생성하는 장치였습니다. 책은 여기서 처음으로 ‘작동하는 사물’이 됩니다.

볼벨(volvelle)또는 휠 차트(wheel chart) 는 회전하는 부품이 포함된 종이 구조물로, 보통 원형 차트 형태로 여러 개의 원이 서로 회전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으며, 이 구조를 통해 특정 정보를 표시하거나 계산할 수 있습니다. 초기 형태의 종이 아날로그 컴퓨터로 간주되기도 합니다.

책 속의 겹 — 해부하는 독서

안드레아스 베살리우스Andreas Vesalius가 『De humani corporis fabrica』 라는 해부학 도서에서 시도한 turn-up 혹은 lift-the-flap 구조 역시 책의 평면성을 넘어섭니다. 인체를 묘사한 그림 위에 얇은 조각들을 덧대어, 독자가 하나씩 들춰가며 내부 구조를 직접 드러내게 했습니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단순히 줄글을 눈으로 따라가는 행위가 아니라, 손으로 조심스레 겹을 열어가며 몸의 비밀에 다가서는 경험이 됩니다. 정보는 단일한 층위로 주어지지 않고, 조심스럽게 해체되고 재구성됩니다. 한 장의 종이 위에 머물던 정보가, 이중적이고 다층적인 구조로 심화됩니다.

안드레아스 베살리우스는 벨기에의 의학자이자 근대 해부학의 창시자입니다.

해시계 책 — 시간을 품은 표지

1678년에 인쇄된 자크 르 루아Jacques la Royer의 『Oeuvres』는 책이라는 물건에 시간을 읽는 기능을 새겨 넣었습니다. 이 희귀한 과학 논문집은 기능성 제본을 가지고 있는데, 한쪽 표지에는 해시계의 부품인 스타일러스(stylus) 또는 노몬(gnomon)이 수납되어 있고 책의 앞 커버 오른쪽 하단에는 해시계 도판이 그려져 있습니다. 독자는 표지에 수납된 부품을 꺼내 책 위에 세워 햇빛을 읽고, 그늘을 따라 시간을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지식을 담는 그릇이었던 책은, 세상을 해석하는 물리적 도구로써의 가능성을 확장합니다. 여기서 책은 시간을 가늠하고, 현재를 측정하며, 독자-사용자를 세계와 직접 연결시키는 매개물이 됩니다.

스타일러스(stylus)는 고대 필기도구의 이름에서 유래한 단어로, 해시계에서는 햇빛을 받아 그림자를 드리우는 뾰족한 부품을 의미합니다. 노몬(gnomon)은 '판단하는 자'를 뜻하는 고대 그리스어에서 온 용어로, 해시계의 시간 측정 기능을 담당하는 구조적 기준이 되는 부품입니다.

위에 소개된 책과 함께 제공된 서적상 E. P. 골드슈미트(E. P. Goldschmidt)의 메모에는 다음과 같은 설명이 있습니다.

"노르망디의 작은 마을에서 인쇄된 드문 사례로, 원래의 제본 상태로 보존되어 있으며, 사실상 천문학 도구를 포함하고 있어 이러한 도구 없이는 완전한 책이라고 할 수 없다.”

이곳에서 책은 평면이 쌓인 집합체를 넘어섭니다. 종이가 겹치고 접히며, 회전하는 움직임을 통해 읽기와 조작, 보기와 만지기 사이를 가로지르게 되며, 책은 사물로서의 차원을 획득하고 손끝을 따라 작동하는 존재가 됩니다. 책이 가진 육면체 내부의 공간을 넘어, 외부와 맞닿는 지점에서의 숨겨진 각을 발견합니다.


이미지 출처

Fig 1: https://skfb.ly/oUVvy Fig 2: By Gutun Owain - National Library of Wales, CC0 Fig 3-5: De humani corporis fabrica. Epitome (CCF.46.36) by Cambridge Digital Library Fig 6: Bodleian Libraries, University of Oxf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