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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보’들’-6
2025. 8. 11.
그리고 늘 거기 그것들 사이 어딘가 번쩍이는 눈들이 이제 더욱 명백하게 여전히 그 시각의 번쩍이는 빛 속에서 드물게 이제 그 맹목을 찢어라. (사무엘 베케트, 『포기한 작업으로부터』, 윤원화 옮김, 워크룸프레스, 2019, 64쪽.)
몇 년 전, ‘더 보이스(The Voice)’라는 음악 경연 프로그램을 한창 즐겨 보았습니다. 서넛의 심사위원이 빨간 의자에 무대를 등지고 앉아 있고, 사람들이 한 명씩 무대로 올라와 노래를 부르면 심사위원이 그 노래를 듣다가 노래가 마음에 들면 빨간 버튼을 눌러 의자를 돌려 무대와 마주합니다. 저는 의자가 돌아갈 때 기뻐하는 노래하는 이들의 표정에 매료되어 끊임없이 다음 영상으로, 또 다음 영상으로 넘어가며 그이들의 노래를 들었습니다. 그러다 2016년 우크라이나 더 보이스에서 엘리나 이바시첸코(Elina Ivaschenko)라는 10대 여성이 〈1944〉라는 노래를 부르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엘리나 이바시첸코가 부른 〈1944〉는 2016년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열린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에서 우크라이나 가수인 자말라(Jamala)가 우승을 할 때 부른 자작곡입니다. 자말라는 1944년 러시아에 의해 크림반도에서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 당한 타타르(Tartars)족 증조할머니를 위해 이 노래를 지었습니다. “낯선 이들이/집으로 들이닥치고/그들은 모두를 죽였다/그들은 정당하다고/죄가 없다고 말했다/인간성이 통곡한다(When strangers are coming/They come to your house/They kill you all/and say/We’re not guilty/not guilty/Where is your mind?/Humanity cries).” 자말라는 “나는 정말로 평화를 원하며, 모두 사랑하길 원한다”라고 수상 소감을 밝혔습니다.
그렇지만 그의 바람처럼 평화나 모든 이들의 사랑은 요원합니다. 세계에는 전쟁이 끊이지 않고, 배 곯는 사람, 목숨을 잃는 사람, 삶의 터를 잃는 사람, 불안한 경제 상황에 놓인 사람, 끊임 없이 분쟁을 피해 걸어 다니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미지나 현상을 보고서 옳다 그르다 누가 잘못했다 따지는 건 아주 쉽고, 그러는 사람은 아주 많지만, 사실은 그 뒤에 죽어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당연한 사실을 잊어버리고 살아가기는 아주 쉽고 편안한 일일 터입니다. 보기에 좋고 듣기에 좋은 현상들로 치환되어, 혁명이나 운동, 그리고 삶을 ‘아름다움’의 일부분으로 가져다 두는 것 역시 아주 쉬운 일입니다.
하지만 어려움을 거슬러 한강의 말을 따라, “세계는 왜 이토록 폭력적이고 고통스러운가? 동시에 세계는 어떻게 이렇게 아름다운가?”라는 질문을 남기고 싶습니다. 한강은 2024년 노벨상을 받으며 많은 사람에게 세계는 왜 폭력적이고 고통스러우며, 동시에 왜 세계는 아름다운지를 묻습니다. 이런 답에 약 7년 전에 그는, 한참 더 예전의, 열두 살의 그를 떠올리며 더듬더듬 답변할 수 있게 되었다는 글을 적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절망하고, 존엄을 믿고 있기 때문에 고통을 느끼는 것이라고, 그러니 고통이야말로 열쇠가 되고 단단한 씨앗이 된다고 말입니다.
열두 살의 내가 어두워져 가는 방의 벽에 기대앉아 이 책을 쥐고, 무엇이 내 눈과 목구멍을 뜨겁게 하는지도 명확히 알지 못한 채 스스로에게 던졌던 질문들의 의미를. 그 질문들이 여전히 내 안에서 생생히 살아 어른어른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그들은 그토록 사랑하는가? 그들을 둘러싼 세상은 왜 그토록 아름다우며 동시에 폭력적인가? 그 열두 살의 나에게, 이제야 더듬더듬 나는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바로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가 절망하는 거라고. 존엄을 믿고 있기 때문에 고통을 느끼는 것이라고. 그러니까, 우리의 고통이야말로 열쇠이며 단단한 씨앗이라고. (〈스웨덴에 간 한강, 동화 속에서 5·18을 떠올리다〉,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201705201167081260)
플라톤은 음악이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이 크다고 보았으며, 영혼의 철학적인 부분을 교육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바른 음악을 듣고 큰 사람은 아름다운 것이나 추한 것을 민감하게 느낄 수 있게 되고, 그렇지 않은 어떤 음악은 듣는 사람을 약하게 만들거나 포악한 마음을 들게 만듭니다. 그래서 ‘선한 것이 곧 아름다운 것’이라는 그의 말에 맞게, 음악의 목표는 도덕적으로 훌륭한 인간을 양성해야 했습니다. 나쁜(혹은 추한) 음악이 있던 것인지는 몰라도, 음악은 아주 오래전부터 전쟁에 이용되었으며, 정치적인 프로파간다(propaganda)로 사용되어 대중의 주의를 끌고 그들의 신체에 자연스레 새겨지는 데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음악은 선한 것/선하지 않은 것, 아름다운 것/추한 것의 경계를 넘는(혹은 균열을 내는) 또다른 가능성, 또다른 감각을 인간에게 전달하기도 합니다. 2020년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가장 오래된 리세우 극장(Gran Teatre del Liceu)에서 한 연주회가 열립니다. 코로나19로 사람들이 밖에 돌아다닐 수 없게 되고, 극장 역시 음악이 끊기고 텅 빈 공간에 공기와 먼지만이 돌아다녔습니다. 락다운이 끝나는 때, 2,292개의 객석에 식물 병원에 입원해 있던 온갖 풀들을 극장으로 초대해 푸치니(G.Puccini)의 현악4중주 중 〈국화(Crisantemi)〉를 연주합니다. 연주가 다 끝나고, 객석 사이로 바람이 불면서 이파리가 서로 부딪치며 마치 박수 소리 같은 소리가 납니다. 공연이 끝나고 이 식물들은 바르셀로나 곳곳에서 코로나19 동안 사람들을 위해 일한 의료진들에게 전달되었다고 합니다.
코넬리우스 카듀(Cornelius Cardew)의 〈논고(Treatise)〉는 193쪽의 악보입니다. 악보이긴 하지만 흔히 악보라 생각하면 있어야 하는 음표나 악상 기호가 없습니다. 기하학적인 선만이 있을 뿐입니다. 제목인 〈논고〉는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의 『논리-철학 논고(Tractatus Logico-Philosophicus)』에서 따왔습니다. 연주자는 스스로 악보가 의미하는 것을 해석해 자신만의 규칙을 만들고 연주해야 합니다. 악보와 작곡가의 지시를 따르는 수행자가 아닌, 함께 음악을 만들어가며 음악에 참여해야만 합니다. 영상을 보면, 연주자가 어떻게 기하학적인 선을 해석하며 연주하는지를 악보와 함께 추측해볼 수 있습니다.

이안니스 크세나키스(Iannis Xenakis)는 1966년 〈Terretektorh〉라는 음악을 작곡합니다. 〈Terretektorh〉은 고대 그리스어에서 따온 말로, terre는 지구를, tektos는 건축을 의미합니다. 검은 점은 악기 각각의 위치를 지정한 것이고, 한 가운데는 지휘자가 서 있습니다. 검은 점을 둘러싼 복잡한 얇은 선들은 청중을 의미합니다. 오케스트라는 무대 위에서 연주하는 연주자들을 청중은 의자 위에 앉아서 관람하는 형식이었다면, 〈Terretektorh〉를 연주를 듣는 청중은 연주자 사이에서, 위치에 따라 어떤 악기의 소리는 아주 크게, 어떤 악기의 소리는 멀리서 들려오는 것처럼 느낄 수 있습니다. 이 곡을 구성하며 크나세키스는 청중이 소리 안에 있게(”the public be within the sound”) 할 것을 가장 고려했다고 합니다. 청중은 소리 안에 잠겨진 자신을 발견합니다(”The public finds itself submerged in the sound.” Santana:2000). 또, 〈EONTA〉에서는 연주자들이 관현악기를 불며 뱅글뱅글 돌거나, 천장을 향해 악기를 연주하거나, 자리를 옮겨 연주하거나, 무대 위를 걸어 다니며 연주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연주자들이 악기와 몸의 위치를 옮기며 듣는 이는 음악을 듣는 것 뿐만 아니라 자신의 몸이 앉아 있는 공간을 인식할 수 있게 됩니다.
랑시에르(Jacques Rancière)는 ‘감각적인 것의 분배’라는 말을 통해, 정치적인 문제를 미학으로 가져 옵니다. 미학은 감각을 분배하고 해석하는 하나의 체제입니다. 감각적인 것의 나눔은 “공통 세계를 규정하는 동시에 이런저런 주체가 공통 세계에 참여하는(몫을 갖는) 방식을 규정하는, 존재하고 보고 사유하고 행위하는 방식 사이의 관계 체계”를 말합니다. 공간과 시간,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들리는 것과 들리지 않는 것은 갈라지고 붙으며, 자리를 나누거나 또다시 나눕니다. 여기에서는 지난 글에서 적은 것처럼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고, 몫 없는 자들에게 몫을 갖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의 깊게 듣고, 듣는 귀를 신뢰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보는 것에 의해 말해진 것을 보지 못하며, 아니면 우리가 말하는 것에 의해 봐야할 것으로 제공된 것을 보지 못한다. 그러므로 [주의 깊게] 듣는 것이, 귀를 신뢰하는 것이 필요하다. (자크 랑시에르, 『이미지의 운명』, 김상운 옮김, 현실문화, 2014, 88쪽.)
카듀와 크세나키스의 악보는 청각을 감각하는 방법을 (새로이) 재배치합니다. 어떤 음악은 해석과 공간을 재배치하며 자신의 자리를 되묻게 합니다. 들뢰즈에 따르면 신체는 힘들의 복합체이자, 위도와 경도로 표시되는 위치입니다. 이런 신체들의 결합이 생성의 공간에서 새로운 공간을 생성합니다. 이러한 소리(의 재분배)를 통해 자신의 자리를 계속 되물어봐야 할 터입니다.
“경험의 시세는 하락했다”, “경험을 나눌 줄 아는 능력을 잃었다.” 벤야민(Walter Benjamin)에게 이야기는 ‘경험을 나누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가 살았던 시대는 ‘야만성의 시대’였고, 그 시대의 특징은 ‘경험의 빈곤’입니다.
경험의 시세는 하락했다. 그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이런 현황에 놀아나지 않는 것은 오로지 우리에게 달려 있다. 어디서 어떻게 “이런 운동이 … 또한 사라지는 것 속에서 새로운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게 만들었”는지 이해하는 것은 오로지 우리에게 달려 있다. (조르주-디디 위베르만, 『반딧불의 잔존』, 김홍기 옮김, 길, 2020, 123쪽.)
경험의 시세는 하락했지만, 그래도 하락한 경험의 시세에 놀아나지 않는 것은 우리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벤야민은 경험을 나누는 이야기꾼을 “듣는 이에게 조언을 해줄 줄 아는 사람”으로 말합니다. 이 조언은 “어떤 물음에 대한 대답이라기보다 (방금 전개되고 있는) 어떤 이야기를 계속 이어가는 것과 관련된 어떤 제안”입니다. 이 글을 쓰기 몇 시간 전, 이스라엘은 가자지구 완전 점령을 목표로 한 군사 작전 첫 단계를 승인했습니다. “세계는 왜 이토록 폭력적이고 고통스러운가? 동시에 세계는 어떻게 이렇게 아름다운가?” 한강의 물음을 다시 마지막 자리에 두며, 세계가 내는 이야기들을 어떻게 해야 이어갈 수 있을지를, 나와 우리의 자리에서 어떤 일을 할 수 있을지를, 당연하다 생각되는 것, 막막한 것에 어떻게 균열을 내고 다른 배치를 상상할 수 있을지를 계속해서 묻고 싶습니다.
그때 문득 글쓰기 뿐 아니라 모든 삶의 모습이 그와 같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나는 했다. 시작도 끝도 알지 못하면서, 한장 한장 벽돌을 구워 쌓아가는 과정. 우리들의 존재는 이 광활한 우주 속에서 하나의 먼지같은 것이지만, 그 먼지 하나하나가 최선의 선의를 품고 존재하는 데에 그 미세한 에너지들의 힘이 있는 것이 아닐까. 그렇게 해서, 그 보이지도 않을 만큼 조그만 개개의 존재들 속에 고요히 우주가 깃드는 것 아닐까. (한강, 『사랑과 사랑을 둘러싼 것들』, 열림원, 2009.)
이 글에 나오는 책
사무엘 베케트, 『포기한 작업으로부터』, 윤원화 옮김, 워크룸프레스, 2019년.
자크 랑시에르, 『이미지의 운명』, 김상운 옮김, 현실문화, 2014년.
조르주-디디 위베르만, 『반딧불의 잔존』, 김홍기 옮김, 길, 2020년.
한강, 『사랑과 사랑을 둘러싼 것들』, 열림원, 2009년.
이미지 출처
(1) 이안니스 크세나키스의 무대 스케치 https://linesandmarks.com/iannis-xenakis-observations/iannis-xenakis-study-for-terretektor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