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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사각지대-5

2025. 7. 11.

초기 책은 수메르인들에게 하나의 작은 점토판이었고, 중국인들에게는 하나의 뼈였으며, 하나의 돌, 하나의 가죽 쪼가리, 하나의 동판 또는 철판, 하나의 파피루스, 하나의 양피지, 하나의 종이였다. (페르난도 바에스, 『책 파괴의 세계사』, 조구호 옮김, 북스페인, 2009년, 34쪽)

책의 구석구석을 뜯어보는 일이 다섯 번째 장에 접어 들면서 그것이 가진 구조, 쓰이는 재료와 불리는 이름들로 비롯되는 물성이자 감각을 여실히 느낍니다. 머리head라고 불리는 책등의 윗부분을 시작으로 낱장의 종이들을 붙잡고 있는 척추spine와 그것의 꼬리tail, 그것들이 책의 표지와 만나는 관절joint이자 이음부로 이루어진 사물. 책은 그것이 만져지기에, 눈에 보이기에 독자를 사로잡는 힘을 분명하게 간직합니다.

인간 신체에 빗대어 이름 붙여진 책의 부분들과 더불어 중세 시대의 책은 금속으로 만들어진 손과 발을 가지기도 했습니다. 이는 당대의 독서 형태-45도 정도로 기울어진 나무 독서대 위에 책을 올려두는 형식-와 책의 보관 방법-양장본으로 만들어진 두께감있는 책이 최대한 손상되지 않는 방식-에 영향을 받아 생겨난 것들입니다. 

책의 종이 냄새, 활자, 무게, 손의 감촉 등 책의 물성과 무게는 많은 독자와 작가들을 매료시키고 독서의 행위는 때로 이 신체와 저 신체 사이의 접촉으로 비유됩니다. ‘책의 세헤라자데’, ‘도서관의 돈 후안’, ‘우리 시대의 몽테뉴’라 불리는, 아르헨티나 출신 작가 알베르토 망구엘Alberto Manguel은 어느 한 인터뷰에서 책에 대해 아래와 같이 이야기합니다.

저는 물신숭배자입니다. 종이의 촉감, 제본과 잉크 특유의 향, 책을 제 손에 들었을 때 느껴지는 묵직함 같은 것들을 사랑합니다. 우리가 책에 관해 이야기할 때 육체적인 사랑을 뜻하는 어휘(amorous vocabulary)를 사용하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것을 침상(잠자리)으로 가져가서, 표지(겉옷)에 손을 얹고, 책장(얇은 천) 사이로 손가락을 미끄러지듯 밀어넣습니다.

프랑스인들은 'jouir de la lecture'라는 표현을 씁니다. 독서에서 쾌락을 찾는다는 뜻으로, 오르가즘에 이르렀을 때 사용하는 것과 같은 단어를 사용하지요.

책은 물질적인 대상이기 때문에 시공간을 가집니다. 사람 손을 타고 해를 쬐고 바람을 맞다가 색이 바래고, 이 공간에서 저 공간으로 옮겨지다가 유실되기도 하며 때론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분해되어 재활용의 운명을 맞이합니다. 체코 작가 보후밀 흐라발(Bohumil Hrabal)의 소설 <너무 시끄러운 고독>에 등장하는 폐지 압축공 한타는, 책을 추상화된 지적 대상이나 단순한 종이 더미로 보지 않고, 인간 신체처럼 생동하는 감각적인 존재로 다룹니다.

그 무렵 압축기로 책들을 압축하노라면, 덜컹대는 고철의 소음 속에서 20기압의 힘으로 그것들을 짓이기고 있노라면, 인간의 뼛조각 소리가 들리곤 했다. 마치 고전 작품들의 뼈와 해골을 압축기에 넣고 갈아댄다고나 할까. 탈무드의 구절들이 딱 들어맞는다는 느낌이었다. “우리는 올리브 열매와 흡사해서, 짓눌리고 쥐어짜인 뒤에야 최상의 자신을 내놓는다.”(보후밀 흐라발, 『너무 시끄러운 고독』, 이창실 옮김, 문학동네, 2016년, 25-26쪽)

마치 유기적인 생명처럼 느껴지는 이 책들이 소멸하게 되는 데는, 물리적인 손상뿐 아니라 자연재해, 화재, 조난 사고, 언어의 소멸, 문화적 흐름의 변화, 그리고 전쟁이나 민족 간 약탈 같은 다양한 요인들이 작용합니다. 그 중 절반 이상의 파괴는 인간의 자발적인 선택으로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1992년 8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국가 및 대학 도서관이 세르비아 군의 집중 포격을 받은 사건이 있습니다. 도서관이 삼일에 걸쳐 통째로 불타야 했던 광경은 당시의 보스니아에서 무슬림을 제거하는 것만이 아닌 과거에 무슬림이 존재했다는 흔적 자체를 지우려한 세르비아인의 의도를 드러냅니다. 한 보스니아 시인은 그 모습을 보고 “타버린 책들의 재가 마치 검은 새들처럼 도시 위로 내려앉았다”고 말했습니다. 

책을 불태우는 행위는 역사 속 또 다른 사건을 즉각 떠올리게 합니다. 바로 1933년 5월의 어느 밤, 베를린의 중심가 오페라 광장에서 4만 명의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유대인 및 기타 ‘비(非)독일적’이라 간주된 작가들—대부분 동성애자이거나 공산주의자, 혹은 둘 다였던—의 책 수천 권이 화염 속으로 사라진 일입니다. 그리고 끔찍하게도 책이 불탄 이후, 그 파괴의 자리를 대신하게 된 대상은 사람이었습니다. 

한권의 책이 파괴되는 것은 인간 신체와 긴밀한 관계를 가지며 그것이 “표상하는 합리성”(존 밀턴, 『아레오파지티카(Areopagitica)』,1644)을 제거하는 일이고, 다른 한권의 책이 쓰이는 것은 현재를 만드는 일이자 인간 신체를 거쳐 이루어집니다. 

책 속에 기입된 글자는 지금 당장 말하지 않기 위해 남겨둔 여백을 포함하고, 책은 파괴 이후에도 유예된 시간과 사유를 담는 느린 물건입니다. 책이 훼손된 여러 사례를 담은 사진을 보고 있노라면, 안전하고 완고하게 보전된 역사 너머에 때로는 영영 다시 쓰일 수 없는 말들이 허공에, 불길 속에 사라진 채로 그 모습을 드러낼 때, 우리는 그 이야기를 잊을 수 없게 되기도 합니다. 

지금까지 “책의 사각지대"라는 제목 아래 써낸 글들은 책에 적힌 이야기를 전달하지 않고 책에 대해 이야기하는 재미를 주었고, 때로 독해를 포기하고 외양을 묘사하는, 사건의 주변부만을 배회하는 것에 매혹된 이 글쓰기는 다양한 읽기를 불러 일으키는 촉매가 된 것 같습니다. 

Things form the very stuff of my dreams; that’s why I pay such distracted attention to certain details of the external world (…) The true reality of an object lies only in a part of it: the rest is the heavy tribute it pays to the material world in exchange for its existence in space.

사물들은 내 꿈의 원료이다. 그래서 나는 외부 세계의 특정 디테일에 산만한 주의를 기울인다 (…) 대상의 진정한 현실성은 그것의 일부에만 존재한다; 나머지는 그것이 공간 안에 존재하기 위해 물질 세계에 치러야 하는 무거운 대가이다. (한글 번역 필자)

(Fernando Pessoa, 『The Book of Disquiet』, Margaret Jull Costa 옮김, New Directions Publishing Corporation, 2017년, 65쪽)



이미지 출처

(1) 대표 이미지 https://www.londonmuseum.org.uk/blog/rare-books-what-makes-them-special-how-to-care-for-them

(2) 책의 구조 https://www.instructables.com/Unbind-a-Hardcover-Book/

(3) 손 모양의 금속 걸쇠 https://crouchrarebooks.com/gallery/rare-books// 발 달린 책 Leiden, University Library, BUR MS Q 1, c. 1100 (photo: Erik Kwakkel)

(4) 19세기 폐지 압축기 https://www.sciencephoto.com/media/776015/view/papermaking-rag-paper-machine-19th-century

(5)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국립 대학 도서관 Agencja Fotograficzna Caro/Alamy Stock Photo / 베를린 오페라 광장 https://www.euronews.com/2023/05/16/nazi-book-burnings-have-taught-us-to-fight-against-attempts-to-silence-minorities-90-years

(6) 런던 홀랜드 하우스 도서관 https://historicengland.org.uk/education/schools-resources/educational-images/the-library-holland-house-kensington-london-37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