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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쓰는 사람들: 『작은 일기』
2025. 7. 29.
일기의 발단은 이렇습니다. ‘2024년 12월 3일 오후 열시 이십삼분, 계엄.’ 집 안의 세면대에 물이 새는 것을 발견하고 기술자에게 연락한 후 이디스 워튼의 『이선 프롬』을 읽고 원고지 다섯 매를 작성하였다는 서술로 시작되는 보통의 일상은 곧이어 난데없이, 계엄이라는 사건에 잡아먹힌 채 흘러가기 시작했습니다. 소설가 황정은이 4년 만에 펴낸 에세이 『작은 일기』는 12·3 계엄 이후 탄핵까지의 촌각을 다투는 시간의 흔적입니다. 비상시국대회가 열리는 국회로 나아가기 위해 국회의사당역 6번 출구를 지나 정문을 통과하고 이미 틈도 없이 모여 있는 사람들에 섞여 절박하게 곤두선 신경을 가다듬으며 집과 광장을 오갔던 나날들이 이 책에 담겨 있습니다. 1976년 서울에서 태어난 황정은은 2005년, 단편소설 「마더」로 경향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했습니다. 『百의 그림자』, 『계속해보겠습니다』, 『디디의 우산』 등의 단·장편소설을 써왔고, 이효석문학상, 대산문학상, 김유정문학상,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 젊은작가상 대상 등을 수상했습니다. 그녀는 본문에서 자기 자신을 ‘본 것을 글로 쓰는’ 사람이라고 명명하는데, 이는 동시에 시선이 꽂히는 대상을 함부로 하지 않겠다는 결연함으로 느껴지기도 합니다. 계엄이 선포된 이튿날, 12월 4일 자의 일기의 말미를 살펴봤습니다. 어떤 사람의 뒷모습에 걸린 아름다운 낙엽을 굳이 털어주어야 하나 망설이던 찰나, 같은 장면을 마주친 다른 이가 먼저 낙엽을 털어드릴까요, 물어보는 순간을 스치고 작가는 아, 기뻐서 웃었다고 썼습니다. 이렇게 단순한 때, 몸과 마음이 다시 그 경직으로부터 가만히 깨어나는 지점이 나타납니다. 일기는 다 지난 일에 관한 일이며, 그것이 날마다 쓰이는 것이라 일대일로 대응하는 것으로 지각되는 체험적인 특유한 읽기입니다. 바로 그 속성 덕분일까요. 멈춘 듯한 삶의 박동이 자연히 다시 뛰리라는 암시가 그로부터 전해져 옵니다. 『작은 일기』는 그 암시가 촛불처럼 자리하고 있는 글입니다.

계엄이래. 김보리가 내 이름을 부르며 다락방으로 올라왔을 때 나는 책을 읽고 있었다. 그날분 원고를 썼고 조용하게 하루를 마무리하는 시간이었다. 믿기지 않았다. 지금 쓰고 있는 단편을 실을 지면이 사라질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 생각을 제일 먼저 했다(그랬다고 기억하고 있다.) 그다음, 원고를 완성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오늘이 지나고 원고를 완성하지 못할 상황이 생길 수 있으니 우선 마무리해야 한다. 그런 생각을 했다. 소식을 듣자마자 국회로 달려간 사람들이 없었다면 오늘 일상은 오늘과 같지 않았을 것이다. 그 찰나에, 그들이 나처럼 생각했다면. 그날 뒤로 이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다. (황정은, 『작은 일기』, 창비, 2025년, 46-47쪽)

계엄부터 탄핵에 이르는 기간 동안 쓰인 일기 중 12월과 1월의 일기는 『작은 일기』라는 책으로 발간되기에 앞서 계간지 ‘문학과사회’ 봄호의 별책 부록 『탄핵-일지』의 일부로 엮여 나왔습니다. 탄핵의 절차가 최종적으로 마무리 지어지지 않은 시점인 3월 초의 이른바 특집호에서 황정은의 ‘日氣’는 송희지·박솔뫼·문보영 등 시인, 소설가, 문학평론가 15인의 문학적 발화와 더불어 장르를 불문하는 구체적인 기록으로 담겨 있습니다. 또한 꾸준히 소설을 발표해 온 황정은에게 의외로 일기라는 장르는 구면이기도 합니다. 창비의 독서 체험 플랫폼 ‘스위치’에서 시작된 연재가 호응을 입어, 『일기日記』라는 제목의 첫 에세이집이 2021년 발간되었습니다. 이 책에는 파주로 이사한 작가의 일상에 코로나19라는 시대의 현상이 겹치며 생긴 일상의 미묘한 변화가 일기의 형식으로 수록되어 있습니다. 작가로서 글을 쓰는 몸을 관리하는 방식과 조카에 관한 사적이고도 즐거운 일화들은 그녀의 삶을 자세히 엿보고 싶어 하는 독자의 궁금증을 어느 정도 해소해 줍니다. 또한 세월호 사건 이후 매년 목포신항을 방문한 일에 관해 쓰며 작가는 자기 자신과 사회가 어떤 의미와 관계를 맺는지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이러한 응시는 그녀의 연작소설 『디디의 우산』에도 비추어지는데, 시대와 현실이 어떻게 소설에서 일어나는 일로 연결되고 현상되는지를 주제로 삼는 데서 읽어낼 수 있습니다.
『작은 일기』는 여러 감정에 사로잡혀 어쩔 줄 모르지만, 외투를 입고 다시 바깥으로 나서는 일을 반복하는 저자의 모습이 그려지는 책입니다. 평소의 원고 작업은 더뎌지고, 불안과 걱정에 신경이 곤두선 채로 유튜브에 접속해 음악 대신 기자회견 방송을 트는 등 하루가 살얼음판처럼 흘러갑니다. 계엄이 터진 후 작가는 습관적으로 날씨 예보를 확인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제보, 어떤 기사와 소식, 때로는 파주 상공에 뜬 헬기를 보고서 가슴이 철렁했던 순간부터 광장을 지키고 선 사람들과 온열 담요를 뒤집어쓴 키세스 시위대를 향한 연대와 지지의 마음은 켜켜이 또 일기의 한쪽으로 나란히 적혀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 시기에 안녕한 하루를 보내기 위해 애써야 했고, 그것은 작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나 이 일기에는 고통의 정도를 다루는 것보다도 어떻게 연대했는가에 관한 감동적인 기록이 실려있기도 합니다. 작가와 자매들이 나눈 많은 이야기, 처음 보는 사람이 건네는 간식, 오래 앉아 있어도 따스한 보온 방석. 탄핵안 가결부터 탄핵 인용의 날까지,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자리를 지키는 시민들의 돌봄이, ‘남태령’이 육화되어 있습니다.
— 4월 4일 금요일 시간기록없음 윤석열이 오늘 파면되었다. 헌법재판소 재판관 전원 일치로 오전 열한시 이십이분에 선고되었다.
불신과 환멸과 걱정과 불안으로 말라 죽을 것 같던 마음이 단숨에 차올랐다. 세상을 향한 감感이 그렇게 또 뒤집혀서, 나는 정말 얄팍하구나, 생각했다. 헌재 앞에 모인 사람들의 함성을 뉴스로 들었다. “당신들하고 동시대를 산 덕분에 이걸 보았어, 영광입니다.” 그 말을 내 집 거실에서 광장의 함성에 보탰다.
그 이름으로 시작되는 마지막 일기가 되기를 바라며 이만 마침. (황정은, 『작은 일기』, 창비, 2025년, 141쪽)
탄핵과 체포를 촉구하는 시민들의 곁을 지키고 떠돌며 황정은은 “그날 밤 우리는 같은 날에 베였다”라고 썼습니다.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의 안위가 모쪼록 평안하기를, 무사하기를 바라는 아주 단순한 소망이 이 일기의 끝맺음으로 귀결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지금은 그녀가 이번 겨울에 읽고 싶다던 많은 소설을 다 만났을까요. 일기에는 이렌 네미롭스키의 『뜨거운 피』를 다시 읽었다고, 이전과는 달리 어쩐지 다시 읽었을 때 ‘비로소 열리는 책’이라고 쓰여 있습니다. 어떤 시간을 관통해 더 이상의 미래가 아닌 현재에 도달한 지금, 과거의 연료로 쓰인 일기는 그대로 소강상태에 접어들지 않고 다음의 타오름을 예비하는 연료로써 읽힐 것입니다.
이 글에 나온 책
황정은, 『작은 일기』, 창비, 2025
이디스 워튼, 『이선 프롬』, 김욱동 옮김, 민음사, 2020
문학과사회 편집동인, 문학과 사회 149호: 2025 봄(본책 + 하이픈), 문학과지성사, 2025
황정은, 『일기日記』, 창비, 2021
황정은, 『디디의 우산』, 창비, 2019
이렌 네미롭스키, 『뜨거운 피』, 이상해 옮김, 빛소굴, 2023
이미지 출처
(1) 황정은의 초상 https://www.khan.co.kr/article/202507102102015
(2) 책 사진 『작은 일기』 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216985545
(3) 책 사진 『탄핵-일기』 https://moonji.com/book/39038/
(4) 책 사진 『일기日記』 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0006108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