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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사각지대-4
2025. 6. 14.
나는 영국 런던에 와있고, 한국을 떠나기 전 가까운 지인 몇몇은 나에게 편지를 남겨주었다. 나에게 남겨진 몇 장의 편지들을 다시 펼치면, 편지에 쓰인 이름들, 편지의 호명과 맺음말을 지우더라도 나는 그것이 누구로부터 온 것인지 알 수 있다. 그들의 필체가 이것을 가능하게 한다.
그것은 문자에 다가가 그것을 독해하기도 전에 벌어지는 일이다. 각각은 너무 고유하고 익숙해서 잠시동안 나를 안정시킨다. 친밀한 사람들의 필체는 그들의 얼굴이나 목소리처럼 하나의 정체성으로 나에게 다가온다. 그런데 그것은 이렇다하게 코드화되어 있다고 말할 수 없다. 그것은 문자이지만 동시에 이미지, 분위기 혹은 움직임이며 코드 안의 코드이거나 코드라고 불리기 애매한 것이다.
(…)
그건 정해진 이름도 아니고 성별도 아니고 자본의 흐름에 따라 흐르는 신체(내가 영국에 와 있는 것과 같은)나 지성의 모양(체)도 아닌 - 이들을 떠올리게 만드는 마주침이다.
위의 글은 약 2년 전쯤, 제가 처음으로 타지 생활을 시작하면서 써두었던 단상입니다. 한평생 익숙했던 세상에서 떨어져 나와,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내가 물리적으로 그곳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더라도 존재하지 않는 것만 같은 실존 붕괴의 순간을 선사하는 곳에 놓이게 되었을 때, 서울에서부터 온 몇 개의 편지지에 담긴 글자들은 한때 저를 존재케 하는 증거이자 위안이 되는 이미지였습니다. 그것이 굳이 해독 가능한 모국어로 쓰여 있지 않더라도 그러했을 것입니다. 나의 삶 속에 있던 타인들의 손끝에서 흘려진 생김새라는 것만으로도 그것이 가진 기능이 있었고, 저는 그때부터 손으로 쓰인 글자에 대한 애정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필적이라는 것, 서사 이전에 제공되는 그 형상은 중세사학자들에게는 개인적인 감상을 넘어선 핵심적인 자료가 되기도 합니다. 중세를 연구하는 학문에서는 날짜 없는 출처가 굉장히 흔하고 당대의 책이나 문서는 전부 손으로 쓰였기 때문입니다. 이에 따라 어떤 필사체를 사용했는지는 문서의 연대, 지역, 용도 등을 식별해주는 중요한 단서가 됩니다.

고문서학Paleography은 과거에 작성된 문서나 기록물의 글씨체, 문자 체계, 필기 양식 등을 연구하는 학문입니다. 필사본의 해독과 연대 추정은 물론, 필체와 기호의 변화, 인쇄 매체에 대한 분석도 포함합니다. 연구자는 문자 형태의 변화, 약어의 사용, 줄 간격, 필기 도구의 흔적 등을 면밀히 분석하여 텍스트를 해석하고 진위를 검증하며 이러한 연구는 역사학, 문헌학, 고고학 등 다양한 학문 분야와 상호 보완적으로 이루어집니다.

중세 유럽의 필사체는 시대와 지역에 따라 다양한 변화를 겪으며 발전했습니다. 4~9세기에 걸쳐 언셜체Uncial 와 하프 언셜체Half-Uncial가 주로 사용되었으며, 이는 둥글고 넓은 글자 형태로 대문자와 유사한 모양을 가졌습니다. 그전까지의 문자가 파피루스 같은 거친 재질의 면에 쓰기 적합한, 획수가 많고 각진 문자를 사용하였다면 초기의 언셜체는 새롭게 등장한 양피지의 부드러운 표면을 사용하여, 두껍고 한 획으로 쓰여지는 필획을 그 특징으로 합니다. 초기에는 단어와 단어 사이의 띄어쓰기가 없었으나, 하프 언셜체에서는 띄어쓰기와 소문자 형태가 나타나면서 문서 작성의 효율이 높아지게 됩니다.
그 후 8세기 후반~12세기에 걸쳐 샤를마뉴 대제 시대에 프랑크 왕국에서 카롤링거 미누스큘라Carolingian minuscule가 등장, 발전하게 됩니다. 이 필기체는 오늘날의 소문자 알파벳과 유사하며, 가독성이 매우 높고 문서 작성 속도가 빨라지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카롤링거 미누스큘라는 라틴 알파벳의 표준화에 기여했으며, 현대 알파벳의 형태에 큰 영향을 미친 필체입니다.
카롤링거Carolingian는 프랑크 왕조의 카롤링거 왕조(Charlemagne, 샤를마뉴 대제)에서 유래하고 미누스큘라minuscule는 라틴어로 소문자를 의미합니다. 즉, 카롤링거 미누스큘라는 소문자 필체의 일종입니다.
12세기 르네상스는 지식과 학문의 확장을 촉진하며, 고전 문헌의 번역과 복원, 대학의 설립 등으로 교육이 급격히 활성화되면서 필사본에 대한 수요가 크게 증가했습니다. 이러한 시대적 요구 속에서 문서의 신속하고 효율적인 작성을 위한 필요성이 대두되었고, 이에 따라 이전에 사용되던 카롤링거 체에서 고딕체Gothic로의 전환이 이루어졌습니다. 고딕체는 좁고 각진 글자 형태에 수직선을 강조하고 글자 간의 밀집이 특징으로, 빼어난 가독성보다는 주어진 크기의 종이에 더 많은 정보를 기록하여 배포하는 데 유리했습니다.
아래는 중세 역사가 알버트 데롤레즈Albert Derolez가 저서<The Palaeography of Gothic Manuscript Books>에서 언급한 카롤링거 미누스큘라에서 고딕체로의 전환에 담긴 필체의 여섯가지 핵심적인 변화입니다. (한글 번역은 필자)
글자들이 더 좁아졌다 Letters became narrower;
두 글자가 합쳐지거나 약간 겹치는 현상, 즉 ‘물어뜯기(biting)’ 현상이 도입되었다 Fusions were introduced, namely the joining or slight overlapping of two adjacent letters (also called ‘biting’);
상향획과 하향획의 길이가 짧아졌다 Shortening of ascenders and descenders;
전통적으로 둥근 획의 일부가 각진 형태를 가지게 되었다(이를 '각진 형태'라고 부른다) Some parts of traditionally round strokes were given an angular appearance (a phenomenon called ‘angularity’);
획이 더 두꺼워졌다 Broadening of the strokes;
미니즘의 발끝이 오른쪽으로 휘어졌으며 상향획의 상단에서 이러한 형태가 가끔 나타나기도 한다. Feet on minims curved to the right (also sometimes observed at the top of ascenders).
(Derolez, The Palaeography of Gothic Manuscript Books, 56-9.)


15세기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기, 학자들과 필경사들은 고딕체의 복잡함과 상대적으로 낮은 가독성을 거부하고 고대 로마의 명료한 문자체로 회귀하려는 움직임을 보였습니다. 이들은 카롤링거 미누스큘라를 재발견하여 이를 기반으로 보다 단정하고 읽기 쉬운 휴머니스트 체Humanist minuscule를 만들어냈습니다. 이 휴머니스트 체는 인쇄술의 발전과 함께 활자 서체로 전환되며 로만체Roman type로 발전하였고, 이후 유럽 전역에서 인쇄물의 표준이 되었습니다. 20세기 초, 영국의 《The Times》 신문은 인쇄 품질 향상과 공간 효율을 목표로 새로운 서체를 필요로 했으며, 이에 따라 휴머니스트 계열 로만체를 기반으로 하되 더욱 실용적으로 조정된 Times New Roman이 1931년에 탄생하였습니다.
여러 시대를 거친 서체의 흐름은 시간 속에서 날짜를 추정할 수 있는 척도가 되어줍니다. 그것은 사건들을 시간 속에 고정시켜 주며, 마침내 그것들을 역사로 만듭니다. 이는 정보의 타당성을 확보해주는, 어찌보면 토막난 채 존재하는 사건들에 이름을 붙여주고 생명을 주는, 그것의 정체성을 확보하는 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성서학과 북서 셈어 연구자인 윌리엄 슈니드윈드 William Schniedewind는 2005년 쓰인 자신의 논문 초록에 고문서학의 한계를 다음과 같이 기술하기도 했습니다.
"고문서학이라고 불리는 학문은 종종 원인과 결과가 명확히 입증되지 않은 순환적 논리circular reasoning에 의존하며, 정확한 날짜를 도출할 만한 충분한 데이터가 없다. 학자들은 또한 역사적 발전을 지나치게 단순화하여, 복잡성보다는 단순한 모델을 가정하는 경향이 있다” (Schniedewind, William M. 2005. “Problems in the Paleographic Dating of Inscriptions.” In The Bible and Radiocarbon Dating: Archaeology, Text and Science, eds. Thomas E. Levy and Thomas Higham. Acumen Publishing. chapter, 405–12.)
고문서학에 대한 이러한 논의는 결국 기록이라는 행위가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지우는가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집니다. 책은 기록을 전제로 성립하는 사물이자, 설령 글자가 적혀 있지 않더라도 어떤 방식으로든 정보를 물리적으로 담아내는 하나의 집합으로 존재합니다. 그리고 기록은 필연적으로 누락이라는 이면을 동반합니다. 쓰인 것에 반하여 쓰이지 않은 것이 있으며, 검증된 역사 곁에는 입증되지 못한 사변이 있고, 문자로 포착된 이야기 너머에는 언어로 담기지 않는 현상이나 목소리들이 있습니다. 이렇듯 필사본의 형상은 오래된 텍스트의 틈이나 한 장의 손편지 속에서, 기록되지 않은 것들과의 불현듯한 마주침으로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이미지 출처
(1) 필사본: https://commons.wikimedia.org/w/index.php?curid=22899580
(2) 중세 필경사: https://blogs.bl.uk/digitisedmanuscripts/2014/06/the-burden-of-writing-scribes-in-medieval-manuscripts.html
(3) 필체: https://en.wikipedia.org/wiki/Insular_script#/media/File:Evolution_of_minuscule.svg
(4) 12세기 고딕: Walters Art Museum, W.18, f. 11v. © 2011 Walters Art Museum, used under a CC BY-SA license
(5) 13세기 중반 고딕: HMML, Arca Artium (aap1306 verso). Used under a CC BY-NC 4.0 license
(6)-(7) 물어뜯기 현상: https://hmmlschool.org/latin-gothi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