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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접촉면-2: 고다르와 파로키

2025. 10. 5.

영상 창작자 이혜목 선생님의 『응답하는 이미지들』이 곧 발간됩니다. 이 책은 이혜목 선생님의 영화(들)에서 (도착한 다음) 출발해, 그가 마주한 이미지에 응답하는 이야기를 꿰맨 책입니다. 편안히 책상 앞에 앉은 지금도 세상에는 수많은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저 역시 그러한 이미지와 마주할 때 불가역적인 어떤 힘 앞에 제가 서 있는 듯해서, 무기력해지곤 하는데요. 저는 종종 베를린 거리에서 본 슈톨퍼슈타인Stolperstein을 생각합니다. 슈톨퍼슈타인은 stopern, 걸려서 비틀거리다와 Stein, 돌을 합쳐 만든 단어입니다. 작은 황동색 판 위에는 이름과 연도, 그리고 독일어를 모르는 제가 읽을 수 없는 어느 장소들이 쓰여 있습니다. 2차세계대전 당시 강제노동수용소에 끌려간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거주하던 집 주변에 그들의 이름과 생이 적혀 있습니다. 그 단어를 처음 들었을 때 저는 제가 마주치는 작고 큰, 저를 걸려 넘어지게 하는 사건들을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오늘 짧게 소개할 이 책을 여러분보다 먼저 읽으면서 저는 제가 마주쳤던 수많은 이미지를 생각하며, 어떻게 우리의 방향을 구현하고 번역해서, 세상을 아주 작은 모양으로도 바꿀 수 있을까를 계속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 글에서는 『응답하는 이미지들』에 등장하는 수많은 이들 중에 장 뤽 고다르Jean-Luc Godard(1930~2022)와 하룬 파로키Harun Farocki(1944~2014)의 영화와 삶의 접촉면을 짧게 소개할 예정입니다. 이 외에도 세상에 물음을 꿰매어 넣는 많은 이들이 이 책에는 등장합니다. 그리고 이혜목 선생님이 그들에 응답한 이미지가 등장합니다. 파로키의 조감독을 맡기도 하고 그에 영향을 받았다고 알려진 크리스티안 페촐트는, 한 인터뷰에서 “이미지를 경유할 때 잔혹함을 해체할 수 있다”는 말을 합니다. 어떤 이미지를 경유해, 그 대상을 그 이미지와 한 데 엮어, 어떤 소리를 그 대상이 내고 있는지를 묻고 싶습니다. 곧 이 책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많이 기대해주세요!


장 뤽 고다르

장 뤽 고다르는 1930년, 파리에서 돈 많은 부모님 아래에서 태어났습니다. 2차 세계대전 동안은 스위스의 가족 저택에서 전쟁을 피해 지냈습니다. 전쟁 후에는 파리로 돌아와 소르본대학교에서 민족학을 전공하며 에릭 로메르가 주도한 영화 연구 모임인 시네 클럽ciné-club에 열심히 다녔다고 합니다. 이때 《카이에 뒤 시네마Cahiers du Cinéma》에서 함께할 앙드레 바쟁, 프랑수아 트뤼포, 클로드 샤브롤 등을 만났다고 합니다. 20세 즈음에는 가족의 경제적 지원이 끊어져 거리에서 음식과 돈을 훔치며 살아갔습니다. 1952년 《카이에 뒤 시네마》에 합류해 여러 영화를 비평하기 시작합니다. 1953년에는 스위스의 댐 건설 현장에서 일하면서 영화를 촬영합니다. 1955년에는 단편 다큐멘터리 〈콘크리트 작전Opération béton〉을 발표하며 영화 감독으로서 데뷔합니다. 1960년, 고다르를 유명하게 만든 영화 〈네 멋대로 해라À Bout De Souffle〉를 발표합니다(한국에서도 이 영화가 많은 반향을 일으켰다 합니다). 이 영화는 프랑수아 트뤼포의 〈400번의 구타Les Quatre Cents Coups〉(1959)와 함께 프랑스 누벨바그Nouvelle vague의 시작으로 여겨집니다. 누벨바그에 속하는 감독은 대부분 《카이에 뒤 시네마》 출신으로, 이들은 전통적인 영화 방식에 대항해 새로운 장치, 점프컷, 핸드 헬드 카메라 등의 새로운 기법을 사용하고, 기존의 영화에서 볼 수 없던 일상의 행위에 주목합니다. 〈네 멋대로 해라〉는 이후 수많은 영화에 오마주되고, 누벨바그 형식의 물결을 시작케 합니다.

1968년, “금지하는 것을 금지하라Il est interdit d'interdire”는 말과 함께, 수많은 학생들이 거리로 나와 시위를 합니다. 노동자와 결합하면서 이들은 샤를 드골 대통령과 가부장적인 기성 권력에 저항하며 큰 규모의 거리 시위를 매일 열었습니다. 영화인들도 마찬가지로 거리로 나옵니다. 1968년 2월, 앙드레 말로(당시 문화부장관)가 시네마테크 프랑세즈 책임자인 앙리 랑글루아를 해임하기로 결정합니다. 여러 영화인들이 랑글루아의 해임을 반대하며 거리로 나와 시위를 합니다. 찰리 체플린, 구로사와 아키라, 잉바르 베리만, 장 르누아르 등 유명 영화 감독들도 랑글루아의 복직을 요구하는 탄원서를 보냅니다. 4월 앙리 랑글루아는 복직했지만 영화에서 출발한 정치에 대한 혁명을 요구하는 기운은 68혁명까지 이어집니다. 68혁명 1년 전인 1967년, 베트남전쟁에 반대하는 감독들이 크리스 마커를 주축으로 요리스 이벤스, 클로드 를루슈, 아녜스 바르다, 알랭 레네, 장 뤽 고다르 등의 감독이 〈머나먼 베트남Loin du Vietnam〉(1967)라는 옴니버스 영화를 만듭니다. (『응답하는 이미지들』에서 이 영화와 함께한 사유를 읽을 수 있습니다.)

68혁명 이후, ‘시영화’ 같은 스타일은 고다르의 영화에서 찾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고다르는 ‘정치’를 향해 장 피에르 고랭, 제라르 마르텡, 나탈리 비야르 등의 동료와 함께 러시아의 감독 지가 베르토프의 이름을 딴 지가 베르토프 집단Dziga Vertov Group을 결성합니다. 지가 베르토프의 이름을 빌린 이유는,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를 반영하는 영화의 환상을 파괴하고, 세계를 새롭게 보기 위해 ‘카메라-눈’의 개념을 제시한 베르토프의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들은 개인의 이름을 버리고 집단의 이름으로 영화를 촬영하며 영화 제도, 영화의 형식 등을 비판합니다. 이 때 〈여기 그리고 다른 곳Ici et Ailleurs〉(1974) 등 다양한 영화를 만듭니다. 1988년부터 10년 동안 고다르는 〈영화의 역사(들)Histoire(s) du cinema〉(1998)를 만듭니다. 이 영화에서 고다르는 그가 빚진 수백편의 영화, 책, 회화, 사진 등을 인용하며 이미지들을 서로 포개어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 냅니다. 그의 (발표된) 마지막 영화는 〈이미지 북Le Livre d’image〉(2018)입니다. 영화, 문서, 그림 등 이미지에서 온 성찰과 전쟁, 중동, 예술 등을 몽타주로 재현representation 행위의 폭력을 정면으로 다룹니다.

영화로 세상을 구하고자 했지만 실패했다고 생각한 그는 ‘영화의 유서’와 ‘자기 자신’을 동시에 촬영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92세의 고다르는 삶과 세상에 지쳐 조력 자살을 선택했습니다. 그는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도 영화를 기획하고 있었습니다. 영화의 제목은 〈시나리오Scénario〉. 이 영화를 완성한 다음날 고다르는 세상을 떠납니다. 영화의 마지막에 고다르는 “이제 알았다(Okay)”라고 말한다 합니다.


하룬 파로키

하룬 파로키는 1944년 체코에서 인도인 아버지와 독일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납니다. 인도, 인도네시아를 거쳐 1958년 베를린으로 이주했습니다. 그는 작가의 꿈을 안고 공부와 삶을 위해 일하면서 야간학교에 다녔고, 그가 쓴 영화 리뷰는 라디오나 신문에 실리기도 합니다. 1963년 베를린자유대학에서 드라마, 사회학, 저널리즘을 공부했습니다.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작품과 장 뤽 고다르의 영화에 관심을 두었습니다. 1966년 독일 영화 텔레비전 아카데미에 다니며 영화 연구에 매진하기 시작합니다. 1960년대 독일에서 빔 벤더스, 라이너 베르나 파스빈더 등이 뉴저먼 시네마의 부흥을 이끌고 있을 때, 파로키는 정치적 활동을 했단 이유로 독일 영화 텔레비전 아카데미에서 퇴학당합니다. 그는 퇴학 이후 혁명과 게릴라 운동을 보기 위해 남미를 여행했습니다.

1966년 첫 영화인 〈두 개의 길Zwei Wege〉이 베를린의 한 텔레비전 채널에서 상영됩니다. 1970년에는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영화화하고, 1973년에는 〈이미지의 난점: 텔레비전 비평Der Ärger mit den Bildern〉이라는 이름의, 방송에 등장하는 단어와 이미지의 관계를 조사하는 비평을 발표합니다. 1979년부타 2000년까지 여러 방송국의 제작 지원으로 『응답하는 이미지들』에도 등장하는 〈당신의 눈 앞에서 - 베트남〉 등의 수많은 작품을 만들고, 1984년까지 《필름 크리틱Filmkritik》을 편집합니다. 파로키는 테오도르 아도르노와 브레히트의 영향을 받아, 파시즘과 산업경제의 관계를 조사하며 〈두 전쟁 사이에서〉, 〈이미지-전쟁〉, 〈세계의 이미지 그리고 전쟁의 각인〉 등을 제작합니다. 1990년부터는 단 하나의 영상만 재생할 수 있는 영화 대신, 여러 채널을 동시에 보일 수 있는 미술관에 전시하는 형태로 작업믈 만들기 시작합니다. 〈인터페이스〉(1995), 〈정물〉(1996) 등이 있습니다.

파로키는 〈꺼지지 않는 불꽃Nicht löschbares Feuer〉(1969)을 제작합니다. 베트남전쟁에서 네이팜탄 아래 희생된 피해자들의 고통을 공유할 수 없다는 사실을 증명키 위해 파로키는 이 영화에사 담뱃불로 자신의 손등에 화상을 입힙니다. 파로키는 베트남 전쟁, 제2차세계대전, 걸프전쟁 등 전쟁의 폭력성부터 소비문화의 이미지를 분석하기 위해 ‘이미지’를 연구합니다. 이미지가 실제로 의미하는 것과 의미를 설명하려 노력합니다. 또한 노동에 대해 파로키는 진지하게 연구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시리즈 중에 하나인 〈노동의 싱글숏Labour in a Single Shot〉은, 2011년부터 안체 에만과 함께 세계 곳곳의 노동 현장을 싱글숏으로 촬영합니다. 또한 〈110년간의 공장을 나서는 노동자들〉(2006)에서는 1895년 첫 영화로 일컬어지는 뤼미에르 형제의 〈공장을 나서는 노동자들〉 이후 수많은 영화 속에서 퇴근하는 노동자의 이미지를 이어 놓습니다.

파로키는 가동적 이미지operational image라는 개념을 제안합니다. 이는 무엇을 재현하거나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행하는 이미지입니다. 이미지는 바라보는 이가 무엇을 하도록 이끕니다. 그는 2014년 베를린에서 세상을 떠났고, 그의 이미지(들)가 여전히 잔존하며, 인간의 ‘두 눈’이 무엇을 보고 무엇으로 이끌어져야 할지를 묻습니다.


『응답하는 이미지들』과 ‘두 눈’

메를로-퐁티에 따르면 ‘나의 몸’은 표상을 거치지 않고서도 세계를 포착하고 파악합니다. 몸은 세계의 매개자입니다. 실천은 습득되고, 습관은 세계와 ‘나’를 (비)주기적으로 접촉하는 접촉면을 만들어냅니다. 저는 세계에 촉발된 사건들과 마주하며 (재)촉발됩니다. 매일의 삶에 멀리서 온, 가까이서 일어나는 장면들이 침입합니다. 어느 책을 읽으며, 제게 닥친 이러한 이미지를 그 이미지가 있어야 할 자리에 놓아 두고, 그 이미지가 ‘스스로’ 운동할 수 있도록 추동하는 것이 저의 역할이란 생각을 한 적 있습니다. 저는 『응답하는 이미지들』을 읽으며 다시 한번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이 책에는 고다르와 파로키뿐만 아니라 수많은 영화와 이미지들을 통과하며 한 데 엮으려 노력하고, 도무지 엮일 수 없는 순간에 그 이미지들이 파열하며 흩어지는 순간 역시 기록해 두었습니다. “무엇인가 죽고 없을 때 그럼에도 남아있는 것을 어떻게 찍을 수 있을까?” 묻는 이혜목 선생님의 말처럼, 우리는 어떤 것의 빈 자리 앞에서 무력함과 마주합니다. “중심이 쓸모를 잃도록 행동하라”, 앤 카슨이 학생들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중심에는 그 중심으로 모든 것을 끌어 모으려는 힘(또는 폭력)이 작동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이미지에 경유해 (혹은 이미지의 자리를 ( )로 비워두고, 필요에 따라 많은 것을 넣어 둘 수 있겠지요) 제가 가진 ‘두 눈’의 힘으로 세계를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응답하는 이미지들』은 그 경유에 어떠한 힘이 될 것이라는 믿음이, 이 책을 함께 건축해가며 조금이나마 생겼습니다. 곧 독자 여러분들과 함께 자신의 ‘두 눈’에 대해 함께 이야기해볼 수 있을 터입니다. 곧 만나 뵙겠습니다!



이미지 출처

(1) 장 뤽 고다르 https://blog.naver.com/cine_play/223721519868

(2) 하룬 파로키 https://ropac.net/artworks/11657-harun-farocki-estate-nicht-loschbares-feuer-inextinguishable-fire-19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