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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의 캐리커처』 저자 이하영 인터뷰

2025. 10. 29.

다음은 철학 연구자 이하영과 『선의 캐리커처: 선택과 시선의 틈새에서(A Caricature of the Good: (n)either Choice (n)or Vision)』  출간을 준비하며 나눈 질답 인터뷰입니다. 편집자의 시선에서 떠오른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해, 또 이 에세이에 보다 가까이 다가서보기 위해 몇 가지 질문을 준비하였고, 저자는 이에 응답해 주었습니다.


(EVM) 원고의 청탁을 받은 뒤 현 주제로 글을 쓰게 된 배경은 무엇이었는지.

(이하영) 가장 긴급한 탐구를 요하는 철학적 주제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카뮈는 ‘자살’이라 답했지만, 저라면 ‘선악’을 택할 것입니다. 단,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압도적인 확신에 힘입어 확정하고, 분명 저와는 다른 사정을 지녔을 타인에게까지 그 결론을 밀어붙일 자신은 늘 없었고 지금도 없습니다. 그래서 선악의 구체적인 항목보다는 선악 자체가 무엇인가, 정확히 말해 우리는 선악을 어떻게 체험하는가에 더 관심이 많습니다. 현상학자이다 보니 후자의 질문이 전자의 질문을 갈음하지는 못해도 적어도 조명해준다고는 생각하고요. 그렇게 선악에 대한 우리의 (다양한 체험 가운데 우선은) 기대를 사유의 일차적 대상으로 삼게 되었습니다.


(EVM) 청탁을 드린 원고는 논문이 아닌 에세이였는데, 이로 인해 마음가짐이 평소와 달라진 바가 있는지.

(이하영) 사실 마음가짐은 똑같습니다. 문장의 의미는 명확하게, 문장의 내용은 (당장의 내가 접근할 수 있는 최선의) 진실에 입각해 쓰자. 다만 연구 논문이었더라면 결코 이 한정된 지면 내에서 이렇게 많은 그리고 거대한 주장을 내세우지는 못했겠지요. 오히려 EVM 측에서는 학술 논문과 에세이 사이의 차이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그리고 저의 결과물이 청탁 주신 당시의 기대에 들어맞았는지 궁금합니다. 이 질문은 추후 뒤풀이의 안주로 삼도록 해요.


(EVM) 예상 혹은 기대하고 있는 독자(층)이 있는지.

(이하영) 기대하고 있는 독자는 ‘무엇이 옳고 그른지 결정하는 데 나 자신(만)의 의견이 얼마나 중요할까?’에 대해 한 번이라도 고민해본 적이 있는 사람. 예상하기는 어렵네요.


(EVM) 편집자로서 원고를 여러 번 읽다 보니 ‘철학 에세이’라는 장르가 내뿜는 중후하고 진지한 분위기를 어떤 의미에서는 의도적으로 배반하는 재치나 유쾌한 표현 등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윤리는 사람의 생명이 걸릴 수도 있는 의제로서 비일상적인 무게감을 지니지만, 동시에 비교적 ‘가볍다’고 말할 수 있는 일상의 순간에서조차 존재감을 발현한다는 양면성을 반영하는 것으로 읽어도 괜찮을지.

(이하영) 구체적인 해석은 편집자 님의 자유에 맡기도록 하겠습니다. 진지하기 때문에만 가능한 재치도 있을 수 있다는 말 정도를 덧붙이고 싶네요.


(EVM) 후속적인 작업도 혹시 염두에 두고 있는지.

(이하영) 네. 만약 작업을 이어나갈 수 있다면, 이 책에서 충분히 다루지 못한 부분들을 보충해 탐구의 완성도를 높이고 싶습니다.

첫째, 곳곳에서 종교적 규범과 도덕적 규범을 ‘윤리’라는 공통된 표제 하에 연속선상에서 취급했는데요. 사실 그 둘은 근본적으로 상이한 구속력을 행사하고, 무엇보다 체험되는 방식 자체가 상당히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이 현상학적 차이를 반영한다면, 수태고지-사고실험의 결론이나 베유 철학에 대한 제 전유의 방식도 달라지리라 예상합니다.

둘째, 소외를 거부하는 자기의 관념은 초역사적으로 유효한 것이 아니라 근대, 특히 코기토의 개념화 이후 이루어진 아주 특수한 역사적 전개의 산물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책에서는 마치 모든 자기가 그 어떤 시공에서든 반드시 특정한 종류의 자율성을 갈망하는 양 전제한 감이 있어요. 달리 말해, 내재와 초월 사이의 경계를 자율적인 자기—어떤 사회적 역할이나 인간종에 고유한 텔로스에 의해 언제나 이미 구속되어있기보다, 주어진 역할과 인간적 사명으로부터 한 걸음 물러나 그것을 의심하고 반성할 여유를 지니는 자기—로 설정하기는 필연적인 일이 아니라 근대 이후를 사는 저의 특수한 철학적 선택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보다 거시적인 시각에서 보부아르, 베유, 머독 그리고 그들에 대한 저의 비판이 전체 철학사 내에 어떻게 위치 지어져야 할지에 관한 고민이 필요합니다.

셋째, 제가 ‘goodness’, ‘the good’, ‘the Good’, ‘ought’ 등의 의미를 딱히 판명하게 구별하지 못했어요. 분명 논리학적, 존재론적, 윤리학적으로 중요한 문제인데도 말입니다. 그 결과 가치평가의 차원the axiological (or the evaluative), 규범의 차원the normative, 의무의 차원the deontic, 도덕의 차원the moral, 윤리의 차원the ethical 등등이 서로 모호하게 뒤섞이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적절한 구분의 필요에 대한 자각이 살아있을 연구에 대한 미련이 남습니다.


(EVM) 필자 본인의 개인적인 경험이 반영된 내용도 있는지.

(이하영) 물론입니다. 유한한 인간인 제가 성취할 수 있는 것은 최선에 불과한데, 선은—특히 이 세 철학자가 개념화하는 선은—최선 이상의 완벽을 요구한다는 것. 이에 대한 경험이 중요했습니다. 당장은 신앙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제가 기독교적 원죄의 관념에 꽤 강력하게 공감하는 이유이고요. 단, 완벽성의 이념이 윤리(학)을 위해 필수불가결하고 대체 불가능한 입장을 고수하면서도, 어떤 완벽주의는 유해하며 심지어는 윤리적으로 유해하다고 생각합니다.


(EVM)마지막으로 세 철학자 가운데 혹시 ‘최애’가 있는지.

(이하영) 단연 머독입니다. 머독의 철학은 정의와 자비를 조화시킴으로써 한 인간을 구제할 힘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단죄하기만 하지 않는 정의, 그저 봐주기만 하지 않는 용서가 무엇일지 고민하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한국 사회에서 잘 이루어지지 않는 고민이고요.


필자의 말에 적극 공감합니다. 첫 책을 시작으로 다음 번에는 아이리스 머독을 전적으로 조명할 수 있는 책을 만들어보고 싶어졌습니다. 『선의 캐리커처: 선택과 시선의 틈새에서』는 철학을 논문이라는 특정한 자리를 벗어나 일상에서도 사유의 영역으로 데려올 수 있으리라는 믿음으로 만들어진 에세이입니다. 그렇게 만들어낸 일상에서 철학의 역할은 실상으로 퍽 평범하기에, 아마 이 책을 들고 읽어나갈 여러분들께도 결코 (내게서) 멀지 않은 가까운 사태라고 인식되리라는 기대가 있습니다. 당신에게 ‘선악’은 어떠한 형상인가요? 책을 접한 후 들려올 여러가지 이야기들이 궁금해지는 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