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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쓰는 사람들: 유미리의 『그 남자에게 보내는 일기』
2025. 4. 26.
“인간의 머릿속을 쫙 갈라서 들여다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나? 타인의 일기를 훔쳐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은 있겠지? 일기를 보면 인간이라는 게 과연 얼마나 악마한테 사로잡힌 존재인지 알 수 있어. 그래서 일기는 재미있는 거야.” (본문에서, 9-10쪽)
『그 남자에게 보내는 일기』는 2001년 1월, 헤어진 불륜 파트너 사이에서 아들 다케하루가 태어난 후 같은 해 4월 애인이었던 히가시 유타카를 떠나보낸 그녀에게 찾아온 꼼짝 없는 하루하루의 굴곡을 수록한 책입니다. 편집자 나카세 유카리의 제안으로 시작된 일기는 일본 문예지 <신초 45>를 통해 2002년 1월호부터 2003년 5월호까지 연재되었습니다. 소설이나 희곡처럼 마감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이며, 당신 글쓰기의 원천을 감각하기에 가장 걸맞은 매체는 역시 일기일 것 같다는 편집자의 조언에 따라서, 유미리는 자신이 쓸 수 있는 일기의 형태를 고민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책장을 열면, 서문 대신에 자리매김한 ‘Dear you’라는 제목의 글이 독자를 맞이합니다. 이는 유미리의 스승이자, 연인인 동시에 창작에 있어 라이벌이기도 했던 히가시 유타카를 지시하는 표현입니다. 만남과 이별을 동시에 맞이한 절체절명의 순간들은 일기 속에서 때로는 사건으로, 때로는 감정으로 쓰였습니다. 있는 그대로의 삶을 온전히 마주하고자 한 시도는 일기라는 매체를 통해 더 적극적으로, 전면적으로 드러납니다.

유미리는 『가족 시네마(1997)』, 『도쿄 우에노 스테이션(2014)』 등의 작품을 쓴 소설가이기도 하지만, 일찍이 17세부터 도쿄 키드 브라더스에 입단해 희곡 작품을 쓴 재일교포 극작가이기도 합니다. 1968년 이바라키현 츠치우라시에서 태어난 그녀는 고등학교를 퇴학당하고 배우를 꿈꾸며 극단에 연구생으로 들어갑니다. 그곳에서 만난 연출가 히가시 유타카는 그녀에게 대뜸 일기 쓰기를 과제로 내주었는데, 감상을 적어주겠다던 그의 약속과는 달리, 유미리는 ‘연기를 하기보다는 글을 쓰는 것이 좋겠다’는 권유를 받습니다. 배우로서의 재능이 없다는 이야기에 충격을 받은 것도 잠시, 곧 유미리는 연극에 올릴 희곡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유독 다른 문예 장르보다도 수상의 기회가 적었던 연극 분야에서 1993년 『물고기의 축제』로 기시다 구니오 희곡상을, 1997년 『가족 시네마』로 아쿠타가와상을 받으며 문단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이후 출판된 소설 『돌에서 헤엄치는 물고기』가 지인의 삶을 모방하여 창작되었다는 혐의로 2002년 최고재판소에서 출판 금지 처분을 받는 등 소송에 휘말리기도 했습니다. 자신의 이야기며 사적인 삶의 면모를 감추지 않고 작품으로서 드러낸 그녀의 행적은 현시점에서도 꽤 파격적인 표현력과 결단으로 보입니다.
일기는 날짜와 날씨를 언급하며, 아들 다케하루를 돌보는 일상의 기록으로 시작됩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아이의 잠자리를 확인하고, 기저귀를 갈거나, 아이가 무엇을 먹고 무엇을 먹지 않았는지를 확인하며 분투하는 매일을 보내는 그녀의 일상은 누군가 바로 옆에서 대신 관찰해 기록해 준 듯이 정확하고 생생히 묘사되어 있습니다. 어머니와 베이비시터가 돌아가며 아이를 보아줄 동안 그녀는 어떻게든 워드 프로세서 앞에 앉아 원고를 쓰려고 하는 등, 스케줄 관리에 상당히 치밀했습니다. 2002년 아사히 신문에 연재되었던 소설 『8월의 저편』 원고를 쓰기 위한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육아와 글쓰기만이 유미리가 치러야 했던 일상적인 과제의 전부는 아닙니다.
2001년 12월 2일. 새로 연재될 소설을 고민하던 중 머릿속 문이 풀리지 않는다는 것을 이유로, 유미리는 색다른 해결법을 떠올립니다. 신체를 단련하고 극한에 이르게 하는 길, 마라톤 풀코스를 달려보면 소설 속 주인공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렇게 편집부 담당자를 통해 만나게 된 코치 사토 지에코 씨, 페이스메이커이자 러닝메이트였던 고우라 이쿠 씨와 함께하는 든든한 훈련이 시작됐습니다. 3월 17일의 동아 서울국제마라톤의 풀코스 참가가 목표였습니다. 석 달이 채 되지 않는 준비 기간을 거쳐 참가한 첫 마라톤에서 4시간 54분 22초로 42.195km를 완주한 날 쓰인 일기는 그간의 노력과 훈련의 결과를 체감하게 합니다. 부상으로 인한 고비를 지나 결승선에 다다라 완전히 지친 상태로 쓰러지고 말았지만, 하루도 지나지 않아 다시 달리는 모습을 자연스럽게 상상하고 있다는 다음 장의 일기를 읽다 보면 아마도 달리기로 인해 생겨났을 무의식적인 생에 대한 의지와 기세가 놀랍기까지 합니다. 앞으로 한 발 나아가기 위해 다시 한번 무릎을 박차고 뛰어오르는 것은, 글을 쓰기 위한 한 글자 한 글자의 과정과 닮아있기도 합니다.
더 잘, 제대로 달리기 위해 그녀는 코치와 파트너뿐만 아니라 편집부 등 각종 경로를 통해 알게 된 달리기 애호가들과 함께하는 훈련에 빠지지 않고 참석하며, 육아와 원고 집필을 병행하는 등의 현실적인 노력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근육 트레이닝도 마다하지 않으며 때로는 쉬어가거나 식단을 고민하는 모습은 아주 진지해서 읽다 보면 독자까지도 자연스럽게 ‘달리고 싶다’는 의지를 샘솟게 합니다. 이렇다 보니, 달리기가 맺어준 인연도 독특합니다. 일기에는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일장기를 달고) 우승한 손기정 선수의 손녀, 손은경 씨와의 교류가 자주 등장합니다. 편지 왕래를 통해 서로 알게 된 그들은, 이후 유미리가 마라톤에 본격적으로 적응하게 되면서 함께 훈련하고 달리는 파트너로서의 관계로 진전했습니다. 가마쿠라의 해안선을 따라 달리는 경로와 그곳에서 마주한, 운명을 지시하는 듯한 기이한 어떤 장면들은 꼭 소설의 한 장면처럼 그려졌습니다.
어쩐지 쓸쓸하고 외로운, ‘당신'을 향한 유미리의 호명과 아이 다케하루를 향한 애정이 숨길 수 없이 드러나는 이 책은 2004년 동아일보사에 의해 출간된 이후 절판되었으므로 중고 책으로 구해 읽는 방법이 유일합니다. 2001년 11월 20일 화요일부터, 2022년 12월 30일 월요일까지의 일기를 다 읽고 나면 일 년 사이에 부쩍 큰 아이의 성장도 느껴지지만, 당장 길게 뻗은 도로를 따라 달리고 싶어지는 마음도 생겨나 있습니다. 존재의 부재를 품고, 쓰거나 쓰지 않는 날들로 채워낸 그녀의 일기는 우리에게 적어도 한 가지 가능성의 길을 열어줍니다. 온 데 갈 데 없는 먹먹한 감정은 글로 쓰일 수 있고, 그것은 다시 살아갈 수 있는 무엇이 되어 준다는 것을.
이 글에서 다루는 책
유미리, 『그 남자에게 보내는 일기』, 동아일보사,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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