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보’들’-3
2025. 5. 3.
비가 내리는 일터에 앉아 있습니다. 아무도 없는 일터에서 종종 저는 노래를 크게 듣습니다. 오늘 역시 일터에는 아무도 없어 노래를 듣습니다. 십 년 전쯤 듣던 아마도이자람밴드의 ‘비가 축축’이 생각났습니다. 무수히 많은 비와 관련된 노래를 연이어 재생합니다.
https://youtu.be/0Ej91dGRyok?si=_Eh3co3azVYQNYzd
아마도이자람밴드의 이자람 씨는 소리꾼입니다. 어릴 적부터 가수로 활동하다가 열 살 때 판소리를 배우는 프로그램에 발탁되어 판소리를 배우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스무 살에는 춘향가를 무려 8시간 동안 완창해서 기네스북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습니다. 그는 끊임없이 새로운 창을 써나가고 있습니다.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희곡에서 ‘억척가’, ‘사천가’를,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를,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이방인의 노래’를 창으로 재해석해 발표해왔습니다. 이자람 씨처럼 민요를 재해석하거나 다양한 장르와 결합하는 소리꾼들이 많습니다. 씽씽, 해파리, 이날치, 잠비나이**···** 제가 모르는 소리꾼들이 더 많을 터입니다.
판소리를 보신 적 있으신가요? 판소리는 소리꾼 한 명이 고수(북을 치는 사람)의 장단에 맞춰 소리, 아니리(말), 발림(몸짓)을 사용해 이야기를, 목소리와 몸을 통해 풀어냅니다. 청중은 ‘얼쑤’, ‘좋다’, ‘잘한다’ 등의 소리를 외치며 판소리의 판에 참여합니다. 이들의 노래는 구전심수(口傳心授, 입 구, 전할 전, 마음 심, 줄 수)의 방법으로 목소리와 마음을 지나 시간을 타고 현재까지 내려져 왔습니다. 악보 없이 스승이 제자에게 한 가락을 들려 주면, 제자는 그대로 따라 연주하거나 부릅니다. 그 가락이 몸에 배일 때까지, 계속해서, 스승과 제자는 목소리와 시간을 오갑니다. 악기를 가르치는 스승은 직접 연주하기도 하지만 구음으로 선율을 읊어주기도 합니다. 장구는 ‘덩’, ‘쿵’, ‘기덕’, ‘더러러러’, 거문고는 ‘당, 동, 징, 덩, 둥, 등, 쌀갱, 싸랭, 슬기둥, 청’, 산조가야금은 ‘청, 흥, 둥, 당, 동, 징, 땅, 지, 찡, 칭, 쫑, 쨍’, 대금은 ‘나, 누, 루, 너, 노, 느, 르, 나’, 꽹가리는 ‘갠지, 갠지, 개갱’ 등의 구음이 있습니다. 정악과 같이 악보로 기보된 음악도 존재하지만, 민요, 판소리, 산조, 시나위 같은 음악들은 모두 이런 구전심수의 방법으로 시간을 타고 현재에 도착했습니다.
“동 슬기동 슬기당 슬기둥뜰당 둥등당동당당뜰 덩흥**···**.”
우리가 방문했을 때, 청운 홍원기는 마침 제자에게 가야금 교습을 시키고 있었다. 정간보를 사이에 두고 연신 구음을 엮어 나가며 줄을 골라 주고, 손놀림의 꺾음새와 속도 같은 연주 기법을 몇 번이고 되풀이해 보여주었다. (유익서, 『소리와 춤을 살았더라』, 열화당, 2023년, 67쪽)

이후 구전된 음악들은 국립국악원의 노력으로 기보되기 시작합니다. 1974년부터 발간된 『국악전집』은 전통음악의 악보를 정간보(井間譜)로 기보해 전승을 계속 이어가려 했습니다. 정간보는 조선시대에 세종이 창안한 국악 기보법으로, 악보의 모양이 우물 정井처럼 생겼다고 해 붙여진 이름입니다. 이 정간보에는 현악 선율, 관악 선율, 장구, 박, 노랫말, 노래 선율 등을 적어 넣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기보되어 있는 악보 하나를 살펴 볼까요? 『백운암금보』는 17세기의 거문고 악보입니다. 편찬한 연도나 엮은 사람의 이름은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폈다 접었다 할 수 있는 서첩 모양으로 되어 있으며, 각 장마다 풀이 먹여져 있고 그 안을 배접한 형태입니다. 지공 번호와 구멍 개폐 기호가 적혀 있어 음의 높낮이를 표현했고, 연주 용어, 시가 용어, 셈여림 용어, 악상 용어 등이 사용되어 있습니다. 또한 현악기의 줄을 고르는 법, 악보의 해석, 시 등 음악과 관련된 다양한 내용이 함께 쓰여 있습니다.

몽골의 모린후르(морин хуур), 베트남의 냐냑(Nhã nhạc), 터키의 메다흘르크(Meddahlik), 타지키스탄과 우즈베키스탄의 샤쉬마콤(Shashmaqom), 포르투갈의 파두(fado) 등 세계의 여러 나라에도 이런 구전심수의 음악들이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저는 종종 인터넷 덕에 세계의 여러 나라 노래를 찾아 듣습니다. 오늘은 비가 오기 때문에, 몽골과 러시아의 접경에 위치한 투바(Тыва)의 훙후루트(Huun-Huur-Tur)의 노래를 찾아 듣습니다. 이들은 흐미(ᠬᠥᠭᠡᠮᠡᠢ, khoomei, 영어로는 Overtone singing)라고 불리는 몽골의 전통 배음 창법으로 노래를 부릅니다. 한 사람이 두 사람의 목소리를 내는 듯한 소리를 냅니다. 이 소리는 초원의 바람 소리를 묘사한 소리라고 합니다. 혀와 입술을 움직여 입 안의 모양을 바꿉니다. 그 중에서 울리는 소리 중 특정한 소리를 크게 냅니다. 훙후루트의 이름 뜻은 ‘태양의 프로펠러’입니다. 그를 닮은 태양과 드넓은 초원을 가로지르는 바람의 소리, 초원에서 풀을 뜯는 짐승을 부르는 소리, 초원에서 죽은 말과 전사의 소리, 그 사이를 가르는 새의 소리가 목소리를 통해 흘러 나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R2ovoRyv4kw
초원의 소리와, 거문고의 소리와, 사람의 목소리, 빈 공간, 박자, 공孔(구멍)과 공空(비다)에서 오는 소리들, 악보 없는 악보들, 음 없는 소음들, 폭우, 바람들. 한 악보 위에서 다른 소리를 내는 수많은 기호들이 쓰이며 음악에서의 바람을 만들어 내고, 듣는 사람에게로 바람이 불게 합니다.
이러한 소리들은 클라리시 리스펙토르(Clarice Lispector)가 음악의 기호로 바친 헌사를 생각나게 합니다.
나는 이것을 베토벤의 폭풍에 바친다. 나는 이것을 바흐의 중성색이 진동하는 순간에 바친다. 나를 졸도시키는 쇼팽에게 바친다. 나를 겁먹게 했으며 나와 함께 불길 속에서 솟구친 스트라빈스키에게 바친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죽음과 변용」에 바친다(이 곡이 내게 하나의 운명을 보여 주었던가?), 무엇보다도 나는 이것을 오늘의 어제들과 오늘에, 드뷔시의 투명한 베일에, 마를노스 노브레에게, 피로코피예프에게, 카를 오르프에게, 쇤베르크에게, 12음 기법 작곡가들에게, 전자 음악 세대의 귀에 거슬리는 여러 외침에 바친다. ― 이들 모두가 나 자신은 알아차리지도 못했던 내 내면의 어떤 영역에 먼저 도달했던 이들, 즉 내가 ‘나’로 터져 나올 때까지 나에 대해 예언해준 예언자들이다. (엘렌 식수, 『리스펙토르의 시간』, 황은주 옮김, 을유문화사, 2025년, 103~104쪽에서 재인용).

거대한 대형을 이루며 떠나는 새를 촬영하는 일, 하지만 넓게 열린 조리개에서 빛만을 포착하는 일, 잘못 읽힌 나의 말들, 그런 희미함들 사이에서, 책상을 치우고, 빨래를 하고, 꺼지지 않는 빛을 그리며 살아있는 카메라가 되어 사라져가는 것을 포착하는 일, 영원히 고정되어 있는 것을 서서히 잊어버리고, 희미한 기억 속에서, 거짓을 말하는 이들 앞에서, 촬영한 진실을 진술하는 일, 새들의 방식, 음악의 방식, 통과 관의 방식, 도주의 방식, 언어의 방식을 주머니에 넣어두는 일, 뚫린 것과 막힌 길 사이에서, 희미한 것을 줍는 일, 새로 올라오는 봄풀 사이에서 지난 겨울을 보낸 나뭇잎을 발견하는 일. 이런 일들에서 들려오는 소리들에게 음악의 기호로 헌사를 바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레이코 시가(Leiko Shiga)의 〈피아노(Piano)〉 연작에서처럼, 희미한 빛을 연주하는 방식으로요.
음악은 자신의 청자를 출생에 선행하는, 들숨에 선행하는, 울음 소리에 선행하는, 날숨에 선행하는, 말하기의 가능성에 선행하는, 홀로인 존재로 끌어들인다. 그렇게 해서 음악은 원래의 존재 안으로 들어간다.(파스칼 키냐르, 『부테스』, 송의경 옮김, 문학과지성사, 2017년, 76쪽.)
이 글에 나온 책
유익서, 『소리와 춤을 살았더라』, 열화당, 2023년.
엘렌 식수, 『리스펙토르의 시간』, 황은주 옮김, 을유문화사, 2025년.
파스칼 키냐르, 『부테스』, 송의경 옮김, 문학과지성사, 2017년.
사진 출처
악보 https://contents.history.go.kr/front/km/print.do?levelId=km_025_0040_0010_0050&whereStr=
『춘향가』 https://www.gugak.go.kr/site/program/board/basicboard/view?menuid=001003002002&pagesize=10&boardtypeid=12&boardid=1284
『백운암금보』 https://contents.history.go.kr/mobile/km/view.do?levelId=km_025_0040_0030_0020
〈피아노(Piano)〉 https://www.liekoshiga.com/works/pian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