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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답하는 이미지들』 저자 이혜목 인터뷰
2025. 11. 5.
『응답하는 이미지들』 출간을 앞두고, 막바지 작업까지도 저자와 세세한 의견을 조율해가며 작업을 마쳤습니다. 문득 지나온 여정을 각자가 어떻게 기억하고 또 느끼고 있는지 궁금해졌습니다. 그래서 책을 만드는 일이 영상창작자 이혜목에게 어떤 경험이었는지를 묻고 답했습니다.
(EVM) 필자에게 책을 만드는 작업은 어떠한 과정이었는지. 그것은 영상을 만드는 일과 어떻게 달랐는지.
(이혜목) 이 책의 원고를 쓰기 시작했을 무렵에 저 자신에게 썼던 편지가 있어요. 제목은 '응답하는 이미지(편지)'입니다. (이제보니 가제가 그대로 지금의 원제로 이어졌네요.) 스스로 일종의 분기점이 필요하다고 느끼던 시점에 책을 만들자는 제안을 받았는데요, 그래서 편지에 '선선한 마음으로 손을 흔들며 그동안의 시간들을 잘 보내주고 싶다'고 썼습니다. 그리고 '왜 영상을 만들고, 글을 쓰고, 연극을 올리고, 공원을 달리고, 시위에 가고, 꽃을 사고, 하루하루를 살아갔는지를 적어놓고 싶었다'고, '왜 지금의 이 방식과는 다르게 살지 못했는지에 대해 스스로를 변호하고 싶었다'고도 적었습니다. 영상 작업을 계속 해나가는 것이 맞는지를 오랜 기간 반문해왔는데, 돌이켜보면 스스로에 대한 회의를 그만두었던 시점에 책 작업이 선물처럼 찾아왔습니다.
초반에는 글쓰기가 막히고 흔들릴 때마다 이 책의 기획과 편집을 맡아주신 세빈님이 보내주신 메일에 의지하며 작업에 임했어요. 영상 제작 과정에서 참고했던 영화들과 작업 노트, 드로잉, 자료들이 구체적으로 등장하면서 개인적인 이야기들이 영상 작업이 되어나가는 경로와 맞닿는 방식으로 원고가 쓰였으면 좋겠다는 말. 그리고 어떤 이미지와 마주쳤고, 그 이미지에 어떻게 응답했는지를 잘 보여줄 것을 권해주신 말 등이 많은 도움이 되었어요. EVM과 처음 함께 구상한 책의 모습은 글과 이미지가 서로 자유롭게 교차하고 갈마들며 관계 맺는 양상을 띤 러프한 작업-노트에 가까웠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책이 제 모양을 갖춰나감에 따라 짜임새 있는 한 권의 에세이가 된 것만 같아요.
영상 작업을 생각해보면, 함께 촬영을 시작하지만 편집은 홀로 마무리하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요. 반대로 책은 처음에 원고는 혼자 쓰지만, 이후에 책의 꼴을 갖춰나가기 위한 과정을 거치면서 수많은 논의와 협업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어 흥미로웠습니다. 그저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어서, 그리고 나를 홀로 외롭게 두지 않기 위해서 영상을 만들었고 또 그 마음이 절실한 외침이자 목소리처럼 느껴졌습니다. 그에 반해 책을 만드는 마음은 그 외침을 어떻게 하면 고립된 상태에 머물게 하지 않고 또 다른 응답들을 위해 문을 열어놓을 수 있을지를 골똘히 머리를 맞대고 궁구하는 일에 가까웠던 것 같아요. 나의 외침이 또 다른 응답이 되게 만들기. 그렇게 또 자리를 바꾸어가며, 새로운 메아리-응답들을 기다리게 됐습니다.
(EVM) 『응답하는 이미지들』은 (작업-노트) 에세이면서도 일기가 들어가 있는, 여러 조각과 파편이 모인 책입니다. 개중에서도 어떻게 호명해야 할지 쉽지 않았던 파편이 있는지.
(이혜목) 원고를 쓰는 과정에서 저를 망설이게 했던 인물은 과거의 제 자신, 구체적으로는 중고등학교 때의 저였습니다. 『응답하는 이미지들』에서는 다루지 못했지만요. 그때의 저를 다소 거칠게 요약하면 '학교(서열화된 교육 구조와 사회의 각종 구조적 폭력)와 불화하는 전교 1등 모범생'이었다고 할 수 있는데요. 저는 그때의 제가 괴롭고, 대책 없이 슬프고 우울하고, 화가 많고, 아팠기 때문에 그 뒤에 고통과 폭력, 학살 같은 주제에 향하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1장. 그 나무가 죽은 후에 나는]을 쓰는 것이 가장 어려웠어요. 그때의 저를 얼마만큼 드러내면 좋을지 몰랐기 때문입니다. 은사시나무 릴리를 좋아하게 된 일과 제가 여러 작업을 하게 된 배경에는 청소년기에 겪었던 우울이 자리하는데, 아직 그 시간들에 대해 할 말을 못 찾기도 했고 성인이 되고 영상 작업을 하면서 그때와는 다른 사람이 된 것 같기도 하여 그 내용은 포함시키지 않기로 자연스럽게 결정하게 됐습니다. 『응답하는 이미지들』이 제가 아닌 제 작업에 관한 책이라고 생각하기도 했고요. 그 시간을 주파해온 과거의 저에게 하나의 가능한 최선의 응답을 보내기 위해 이 자리에 서 있다고 생각하려고 합니다.
(EVM) 예상 혹은 기대하고 있는 독자(층)이 있는지.
(이혜목) 스무 살이 될 때까지 예술에 대해 알지 못했고, 이후 무언가를 만드는 일을 하게 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때문에 평소 예술에 대해 문외한이라고 느꼈던 과거의 저와 같은 독자분들, 그리고 무언가를 만들고 싶지만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몰라 고민이신 예비 창작자 분들께 이 책이 가닿았으면 좋겠습니다. 글이 정해진 결말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길잃음과 혼란의 정서가 많이 덜어지긴 했지만, 알 수 없는 끌림과 여러 질문들을 따라가며 영문 모른 채로 무턱대고 무언가를 만들어 나가는 과정에 동반되었던 외로움과 막막함, 자기 의심과 혼란을 기억합니다. 좌충우돌을 거쳐 뜻하지 않은 결과물을 마주하는 과정이, 과거의 저와 비슷한 상황에 계신 분들께 도움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예술에 대해 잘 모른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에게도 무언가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지켜보는 일이 역시 어떤 열쇠가 되어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영화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영화와는 다른 종류의 영상을 만드는 창작자들이 있다는 것, 그리고 예술의 범주 안에서 사회·정치적 문제를 다루며 발화하는 창작자들이 있다는 것이 제 시야를 넓혀주었고 또 이 사실이 곧 제게는 동력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책 또한 그러한 마중물의 역할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VM) EVM과 작업하는 것은 어떤 경험이었는지.
(이혜목) ‘EVM은 출판을 위해 태어난, 이른바 출판 요정 집단이다.’ 옆에서 지켜본 바, 이것은 인간계의 능력을 벗어난 것이기 때문에 저는 이 분들이 ‘요정’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명확한 피드백과 사려 깊은 제안들로 책을 만드는 과정 전반을 책임져주신 수지님, 저보다 제 글을 더 잘 살펴봐주시고, 매번 정확하고 눈 밝은 제안을 주셨던 세빈님, 그리고 말 그대로 무에서 유를 창조해내시는 명민님을 지켜보며 저는 경이로움을 느꼈습니다. 대체 이 분들은 그동안 어디에 계셨던 것이며, 어떻게 이 출판 콜렉티브를 만들게 되셨는지 저는 몹시 궁금해졌습니다. 책을 만드는 일에 이렇게나 많은 노동과 의견 교환이 필요하다는 것도 처음 알게 되었지만, 책을 기획하고 교정과 디자인 작업을 거쳐 세상에 선보이는 일이 종합 예술의 영역이라는 것을 실감하는 과정이기도 했어요. 이 일을 예술의 경지에서 행해주신 세 분께 탄복과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습니다. 세 분의 능력과 감각과 판단을 깊이 신뢰하게 되었다는 말씀을 드리며, 기회가 된다면 다음에도 EVM과 함께 또 책을 만들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이번 원고를 탈고한 이후로 조금 더 실험적인 형식의 글을 써보고 싶어졌습니다. 이는 (잘 아시다시피) 차학경의 『딕테』 같은 책을 쓰고 만들어보는 것이 제 오랜 꿈이었기 때문인데요. EVM 분들과 함께라면 그 꿈을 이룰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때까지 출판 콜렉티브 EVM의 활동이 앞으로도 성공적으로 이어지기를 응원하는 마음으로, 남은 여정을 함께 하겠습니다.
(EVM) 벌써 올해의 마지막, 또 다가올 신년을 앞두고 있습니다. 앞으로의 작업과 관련된, 앞두고 있는 즐거운 일 하나를 공유해줄 수 있는지?
(이혜목) 아직 확정된 것은 아니지만, 내년에 차학경의 영상 및 퍼포먼스 연구로 학위 논문을 작성하기 위해 해외 답사를 계획하고 있습니다. 차학경 관련 아카이브를 소장 및 관리하고 있는 대학 도서관을 방문하는 동시에, 내년 1월에 미국에서 차학경의 작업을 중심으로 한 대규모 회고전이 열릴 예정이어서 해당 전시를 보고 오려고 합니다. 차학경이 실험적이고 어느 한 곳으로 귀속되거나 환원되지 않는 성격의 작업을 했던 만큼, 저도 ‘형식’에 대한 화두를 가지고, 어떻게 하면 영상에 사회·정치적인 문제를 잘 담아낼 수 있을지를 고민하고 계속해서 탐구해나갈 것입니다.
(EVM) 본문의 시위 현장에서 '캠코더가 출연자에게로 넘겨진' 것처럼, 그리고 또 한 대가 아닌 두 대의 카메라가 등장한 것처럼, 만약 EVM에게 질문의 화살표가 향하게 된다면?
(이혜목) 저 또한 EVM에게 이 책의 편집 후기에 대해 여쭤보고 싶어요. 원래 생각하셨던 기획에서 달라진 부분도 있겠지만, 이번 작업을 어떻게 평가하시는지도 궁금합니다. 그동안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막상 ‘편집 후기’를 묻는 마이크가 이 쪽으로 날아오니 어떻게 답변을 하면 좋을까 괜히 고민하게 되는군요. 책을 만드는 일은 새삼스럽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협업이 아닐까? 두 권의 에세이를 만드는 동안, 협업에 가졌던 불필요한 낯선 생각들이 자연스럽게 저 멀리로 날아갔어요. 내 옆에 책의 모양이며 내용에 충분히 귀기울여 줄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지요.
『응답하는 이미지들』의 경우 도판을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싣는 것이 좋은가에 관해 여러 번 논의가 있었고, 이 과정에서 탈락되거나 사라진, 혹은 모종의 연유로 책에는 넣을 수 없었던 이미지들이 있습니다. 아쉬움을 뒤로 하면서도, 반드시 집어넣으려고 하는 필자의 작품 도판을 어떻게 실을지가 가장 고민스러웠어요. 그것이 이미지를 다루는 여타의 사진집이나 일러스트집과는 다른, 글과 함께 가는 느낌을 주기를 바랐습니다. 이미지 또한 일종의 ‘읽을거리’ 이지요. 가능한 흥미로운 읽을거리를 독자에게 전달하고자 했던 조율의 결과가 이번 책에서 잘 드러났기를 바랄 뿐입니다. 이미지와 텍스트가 서로 상응하고, 또 조응하듯이. (필자의 말처럼) 서로가 응답하듯이. 필자의 말을 잘 듣고 그것을 잘 반영하는 일에 집중하고 싶었습니다.
책을 만든다는 것은 종이 위의 말과 이미지로 낯선 이에게 전해질 책이 어떻게 보여질지, 또 그것의 최종 목적지가 언제쯤인지 알지 못하면서 계속해서 쓰다듬고 아낌 없이 반듯한 손길과 눈빛으로 돌보아야 하는 일이었어요. 무엇보다도 저자분들과 열린 마음으로 의견을 주고 받기에 가장 커다란 기쁨과 알 수 없는 안도를 느꼈습니다. 내가 잘 모른다고 한들, 내 옆사람의 시야가 뭔갈 봐주리라는 그 믿음이 걱정 없이 다음으로, 앞으로 나아가게 해주었네요. 책을 만드는 것은 무척 기쁘고, 또 즐거운 일! 다음의 책이 벌써부터 기다려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