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된 스코어, 스코어가 된 디자인』 저자 이주현 인터뷰

『디자인된 스코어, 스코어가 된 디자인』은 그래픽 디자인을 경유해 스코어를, 스코어를 경유해 그래픽 디자인을 탐구하는 에세이입니다. 여기서 ‘스코어’라는 표현이 다소 생소하게 느껴지시는 분들이 있을 텐데요. 스코어란 무용의 움직임을 다양한 기호를 사용하여 기록하거나 지시하는 것으로, 댄스 스코어dance score, 댄스 노테이션dance notation, 무보舞譜 등을 포함해 이르는 말입니다. 하나의 디자인으로 지시된 스코어가 퍼포머와 만났을 때, 스코어는 계획과 내용을 넘나들며 실험적인 단독의 매체로 부상하기도 하는데요. 이번 에세이를 준비하는 동안 떠올랐던 궁금증과 에피소드에 대해 저자 이주현 님과 나눈 인터뷰를 서면 인터뷰를 공유합니다.



(EVM) 디자인을 통해서 스코어를, 스코어를 통해서 디자인을 다루는 책 『디자인이 된 스코어, 스코어가 된 디자인』은 주현 님의 석사학위 논문에서 출발한 원고입니다. 스코어라는 주제에 처음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있다면 간단히 소개해 주실 수 있나요? 논문의 형식을 취했던 이전 글의 이미지와는 달리, 에세이에서는 어떤 내용을 더 실어볼 예정이신가요?

(이주현) 석사학위 논문을 쓰기 위해서 2년 동안의 제 작업들을 쭉 펼쳐놓고 가만히 바라보는 시간을 가졌어요. 분명 작업들이 서로 공유하는 지점이 있는 것 같은데 뭔지 잘 모르겠더라고요. 그래서 제 작업들을 굉장히 모호한 문장으로 정의했었어요. 예를 들어 목적지 없이 돌고 돌아서 어딘가에 도착하는 여행을 제 디자인에 비유했었는데 제 디자인 작업도 모호하고, 정의하는 문장도 명확하지 않으니까 시작을 못하겠더라고요. 근데 그 당시에 오민 작가님의 『스코어 스코어』(작업실유령, 2017)를 읽고 있었어요. 다시 생각해 보니까 제가 누군가에게 수행을 부탁하고 지시를 내리고, 그 과정에서 필요한 것들을 디자인하는 모든 것이 스코어와 연결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때부터 스코어라는 주제를 붙잡고 여기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논문을 완성했던 시기가 2023년이니까, 3년이라는 시간을 보내면서 그 사이에 제가 경험해왔던 스코어에 관한 이야기를 추가했어요. 정말 신기하게도 제가 이 논문을 쓰고 나서 주변에 스코어를 가지고 작업하고 고민하는 동료 분들이 자연스럽게 늘어났어요. 그래서 의도치 않게 계속해서 연구할 기회가 주어졌다고 생각해요. ‘스코어’의 흐름과 사례를 분석했던 논문에서 출발해 이 에세이는 저에게 스코어를 알려준 사람, 스코어를 이미 연구하고 있던 사람, 그리고 함께 스코어를 가지고 대화를 나눠준 사람까지 이 사람들을 다 경유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고 보면 될 것 같아요. 아쉬웠던 부분을 채워나갈 수 있는 시간이었어요. 대표적인 예로, 토마스 레멘의 작업을 분석하고 싶었는데 인터넷에 있는 건 오직 사진 한 장뿐이라 그에게 이메일을 보냈더니 흔쾌히 실물을 보내주었어요. 논문 마감 이후에 택배를 받아서 언제나 아쉬운 마음이었는데 이번에 더 자세히 다룰 수 있어서 기쁩니다.


(EVM) 주현 님이 최초로 메모하거나 기록하기 시작한 스코어는 무엇인가요? 스코어라고 여겨지는 가장 단순한 기록이자 기억이 궁금합니다.

(이주현) 최초로 기록한 스코어를 떠올려 보자면 아마도 제 바이올린 교재가 아니었을까 해요. 우연한 기회로 접한 바이올린을 4년 정도 배우게 되었는데 악보에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제가 자주 놓치거나 신경 쓰면서 연주해야 할 부분들을 오선보 바깥의 하얀 지면에 기록해 두고는 했어요. 저의 최초 스코어이자 가장 단순한 기록은 저를 향한 지시였네요.


(EVM) 예상되는 독자가 있을지, 혹은 기대하고 있는 독자층이 있을까요?

(이주현) 제가 스코어를 연구하고 싶다는 마음이 생긴 출발점부터 스코어의 역사적 흐름, 동시대 작가들이 활용하는 스코어의 형태, 더 나아가 제가 스코어를 경험하면서 느꼈던 지점들까지 순서대로 이 책에 펼쳐 놓았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저처럼 디자인 작업을 하면서 스코어에 관심이 있는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스코어가 궁금한 사람, 디자이너와 작가라는 두 단어 사이를 고민해 본 사람에게도 이 책이 약간의 해소감을 줄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또한, 저는 제가 운영하는 출판사를 통해서 제 개인 작업들을 소개해 왔는데요. 모든 책에는 제 작업에 대한 짧은 해설을 함께 덧붙이는 편이에요. 같은 작업들이 이 책에도 실리지만 다른 관점에서 글을 쓰려고 했어요. 이전의 해설과 이번 글을 비교해 보는 재미도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EVM) 지난 여름 EVM 구성원이 함께 주현 님이 다른 퍼포머분들과 함께 중력장에서 치르신 공연 〈의성어의 집〉에 다녀왔습니다. 저희도 스코어 수행을 경험한 인상깊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디자이너 때로는 퍼포머로서 행사에 참여하게 되는 기회는 주현님께 어떻게 일어나나요? 주현 님이 동료를 어디서 만나게 되는지, 또 동료와 어떻게 관계맺는지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이주현) 〈의성어의 집〉은 저에게도 굉장히 특별한 경험이었어요. 〈의성어의 집〉을 기획한 양위차오와의 인연은 제가 〈2023 타이포잔치: 국제 타이포그래피 비엔날레 《따옴표 열고 따옴표 닫고》〉(문화역서울)의 코디네이터로 일하면서 시작되었는데요. 그때 그가 칠판을 활용해서 구술 퍼포먼스를 했는데 그게 너무 강력한 기억으로 남았어요. 그래서 몇 년 뒤 양위차오가 다시 한국에서 공연을 할 때 찾아뵙고 어떤 것이든 나중에 같이 해보고 싶다고 먼저 제안했어요. 제가 상상했던 것은 제가 양위차오의 무언가를 디자인하는 일이 었는데 오히려 그가 저를 퍼포머로 초대해 줘서 놀랐습니다. 예상하지 못한 제안이었지만, 이 책의 마침표 같은 역할을 해줘서 소중한 경험이었다고 생각해요. 제가 동료를 만나는 과정은 거의 비슷해요. 워크숍, 공연, 강연 등 제가 관심 있는 것들을 빼놓지 않고 참석하는 편입니다. 그런데 그러다 보면 자주 마주치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들의 작업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어느새 하염없이 그 작업들을 좋아하고 있는 저를 발견하게 되고요. 그렇게 그 사람들이 지금의 제 동료들이 되었습니다. 제가 EVM의 문을 두드린 것도 같은 맥락이고요. (^^)


(EVM) (이전 질문에 이어) 책에 실린 여러 작업과 에피소드를 읽으면서 주현 님이 해오신 여러 가지의 협업을 엿봤습니다. 디자이너로서 작업하는 일과, 다른 사람과 협업하여 작업하는 일은 어떻게 다른지 이야기를 들려주실 수 있을까요?

(이주현) 출판사를 나와서 처음에 프리랜서 디자이너로 활동할 때는 클라이언트와 저 사이에 경계가 굉장히 분명하다고 느꼈어요. 단순히 위계의 문제라기보다는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 느낌이랄까요. 지금은 디자이너로서 작업하는 일도 저에게는 협업의 연장선이에요. 왜냐하면 저는 동료들의 디자인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거든요. 그들이 작업하는 과정을 지켜보고 고민을 나누고 그것을 발표하기 위한 전시, 공연, 워크숍의 시각물을 디자인해요. 그렇게 함께했던 과정을 디자인에 담아내는 것이 제일 즐겁고요. 그리고 제가 개인 작업을 할 때 도움을 요청을 하기도 하고 그렇게 계속해서 서로의 삶을 조금씩 뜯어내어 뭉치는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EVM) 예정 중인 작업이나 스코어 작업 관련 계획이 있으시다면 간단히 소개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이주현) 요즘에는 계속해서 제가 발을 딛고 서 있는 장소를 바꾸고 있어요. 5월에는 잠시 원주에 머물렀고, 지금은 해외에서 지내고 있어요. 원주에서 지내는 동안에는 매일 들은 새소리를 녹음하고 풍경을 찍고 그날 발견한 식물과 곤충을 기록했어요. 지금은 예전부터 하고 싶었던 도판에 관한 리서치를 하고 있어요. 저는 이게 스코어와 관련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계속 글을 쓰다 보니까 결국 또 이어지는 지점이 있더라고요. 이게 무엇이 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어요. 언제나 책으로 완성된 모습을 상상하기는 합니다.



이야기를 듣다 보니 스코어란 가능한 지시에 맞춰 음정과 박자를 지키며 악기를 연주하는 일처럼 어떠한 움직임을 기록하고 보여주는 매체의 기호일 뿐만 아니라, 넓게는 주체가 기억하는 순간을 불러오는 주술이자 메모에 가까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주현의 『디자인된 스코어, 스코어가 된 디자인』을 펼쳐 읽다 보면 어떤 페이지에는 독자에게 지시하는 스코어가 숨어있는데요(!) 읽는 이가 지시를 발견하게 되었을 때 그 스코어를 따라 자신만의 스코어를 수행해 보기도 하는, 즐거운 시간이 찾아오기를 기대하며 책을 편집했습니다. 한 번 스코어를 따라 순간을 수행해 보시는 것은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