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장소, 장소의 영화-2: 땅에(서) 몸을 묻기

죽음이여, 자부할 것 없네

한 사람이 죽으면 한 챕터가
책에서 찢겨 나가는 게 아니라,
다른 언어로 더 잘 번역되는 거라네.¹


뜨거운 여름, 조금이라도 덜 더운 때를 찾아 해가 뜨기도 전에 논밭 사이를 달린다. 긴 장마가 끝나고 논 사이에는 풀을 베러 나온 사람들이 보인다. 여름이 닥치기 전 일기장에 적어 두었던 기억이 떠오른다. 그 기억은 이렇다.

나는 도서관에서 일하고 있다. 창문을 열어둘 수 있는 계절이면 늘 창문을 열어둔다. 바깥의 소리가 예고치 않고 도서관을 울린다. 바깥에는 논이 많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논에 벼를 심는 트랙터 소리로 바깥이 소란했다. 벼농사 짓는 농부가 한 해에 가장 바쁜 때. 벼를 다 심고서도, 개량이 많이 된 턱에 수확량이 충분해 뜬모를 더 이상 하지 않아도 괜찮지만 군데 군데 뜬모를 하러 초록빛 논 사이에 허리를 숙인 사람들이 보인다.
해마다 기온 변화가 심심찮다는 말이 들린다. 농사를 짓지 않는 나는 출퇴근길 팔을 스치는 뜨거운 바람을 느끼며, 예년보다 빠르게 더워지는 것 같다는 짐작만 할 뿐이다. 이 주 전쯤, 모내기를 곧 해야 하는데 며칠 이어진 뜨거운 날씨 덕에 이웃 동네 이장님의 모가 말라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장님은 이 논 저 논 다니면서 이웃 젊은 농부들에게 이제 물을 대야 한다, 논을 더 판판히 다져야 한다, 모에 물을 더 줘야 한다, 논을 아직도 갈지 않았냐, 이러 저러 잔소리를 하러 다니셔야 하는데, 한 해 농사의 전부인 모가 다 타 죽어 그 잔소리마저 뚝 끊겼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웃 농부는 농업기술센터에서 일하는 아는 이에게 전화해 모를 구했다. 어떻게 모를 구했을까 싶었는데 아는 이가 젊은 농부들에게 줄 뜨거운 피자와 모를 함께 들고 찾아왔단 이야기를 들었다. 논에는 무사히 모내기가 되었다. 나는 애타는 그 마음을 짐작만 할 뿐이다.

바깥 트랙터가 들리는 도서관에 앉아 점심시간마다 영화를 보기 시작했다. 알리체 로르바케르(Alice Rohrwacher)²의 〈더 원더스(Le meraviglie)〉(2014)를 보고, 농부의 딸로 태어나 농촌에서 계속 살아온 나의 삶이 자꾸 떠올라서 그의 영화를 이것저것 들춰보던 때, 프랑스 작가 JR과 함께 한 〈오멜리아 콘타디나(Omelia Contadina)〉(2020)³를 찾았다. 10분이 안 되는 짧은 길이의 영상이다. JR은 아녜스 바르다(Agnes Varda, 1928~2019)와 함께한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Visages Villages)〉(2018)을 보고 알게 된 작가로, 그의 사진 작업을 즐겁게 보던 터라 반가웠다.
영화의 내용은 간단하다. 농사가 다 끝난 땅 위로 거대한 흑백 사진이 지나간다. 검은 옷을 입은 무리가 그 거대한 흑백 사진을 끌고 밭 위를 걷는다. 미리 파 둔 땅 위에 흑백 사진을 올려두고, 여러 사람⁴이 모여 흙을 덮기 시작한다. 장례를 거행하는 동안 추도 연설이 진행된다.

알리체 로르바케르와 JR은 2019년 여름 이탈리아의 라치오(Lazio)와 토스카나(Tuscany), 움브리아(Umbria)의 경계를 걸으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 지역은 초콜릿을 생산하는 원료인 헤이즐넛의 주산지⁵이다. 로르바케르는 멀리까지 펼쳐진 헤이즐넛 과수원을 바라보며 이 풍경이 마치 무덤처럼 보인다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농민들의 투쟁에 대해, 풍경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풍경이 묘지와 같다면 장례식을 치러야 하겠다고 결심한다. 이 장례식에는 죽음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삶이 가득 차야 한다고도 생각한다. 둘은 이 작업이 알피나 고원의 투쟁을 지원⁶하는 영화적 행동(Cinematic Action)이라고 설명한다.

“지난 여름, 라치오(Lazio)와 토스카나(Tuscany), 움브리아(Umbria)의 경계를 내 친구 아티스트인 JR과 함께 걸었다. 그에게 난 전체 지역에서 행해지는 집약적인 단일경작의 확산으로 농업 경관이 훼손되었다는 우려를 말했다. 양봉가의 딸로서, 나는 그에게 곤충의 떼죽음에 대해 말해왔고, 투기, 보조금, 살충제로 가득 찬 이 강을 막으려는 소농들의 투쟁에 대해 말해왔다. 우리는 끊기지 않고 줄지어있는 돌들로 표시된 풍경을 바라보며, 이곳이 마치 묘지처럼 보인다고 말했다. 돌아오는 길에 이 풍경이 묘지처럼 보인다면 장례식을 치러야 한다고 결심했다. 하지만 이 장례식에 삶이 가득 차게 하자! 이 일이 “오멜리아 콘타디나” 프로젝트의 탄생이다. 이는 우리의 작업으로 알피나(Alfina) 고원의 소농들과 시민의 투쟁을 지원하고자 했다. 바로 영화적 행동(Cinematic Action)이다. 장례식일 뿐만 아니라 매일매일 우리의 식량을 생산하고 우리를 살아있게 해주는 모든 사람에게 바치는 희망의 찬송가이기도 하다.”⁷

알리체 로르바케르와 JR은 2019년 11월 초에 움브리아로 돌아가 작업을 시작했다. JR은 알피나 고원에서 전통적인 방식으로 농사를 짓는 네 명의 남녀 농부의 초상을 촬영해 커다란 방수천에 인쇄했다. 그리고 카스텔 조르지오(Castel Giorgio)와 오나노(Onano) 지역 금관악 밴드인 Compagnia de la Panatella⁸에게 음악을 맡겼다. 그리고 농부들의 농지에 무덤을 만들었다. 장례를 거행하는 동안 추도 연설(Eulogies)을 진행했고, 로르바케르는 땅 위의 사람들을 찍었다.


풍경으로부터

헤이즐넛 단일경작(Monoculture)⁹은 로르바케르와 JR이 보았던 거대한 공동묘지 같은 풍경을 만든다. 또한 물을 오염시키고, 다양한 생물의 터전을 파괴하며 생물다양성을 위협한다. 많은 땅에서 이러한 문제가 반복된다. 대부분 생물은 생존을 위해 무언가를 먹어야 한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인류는 채집과 수렵을 거쳐 신석기부터 농사를 시작하며 모여 살았다. 농업이 인류 문명과 발전했고, 무엇보다 먹거리 없이는 문명에서부터 개개인의 삶까지 이어갈 수 없다는 사실은 자명하다. 물론 어느 상상처럼 약 한 알로 모든 영양소를 채울 수 있고 인간에게 ‘먹을 필요’가 필요치 않게 될 수도 있지만 말이다.¹⁰ 해러웨이(Donna J. Haraway)는 지구의 다양한 거주자와 연대를 통해 함께 살고 죽기를 해야 한다고 말하며, 퇴비주의(compostism)를 주장한다. 농민은 땅과 그 속 생물과 함께 생산과 재생산을 반복하며, 인간과 자연의 공진화(co-evalution)을 통해 농산물을 생산해 왔다.
하지만 농업은 여러 위기에 처해 있다. 1980년대 신자유주의의 확산, 우루과이라운드 이후 농화학기업이 농업에 막대한 영향을 행사하며 ‘먹거리 제국(food empire)’이 등장했다. 농촌은 “비자본주의적(이윤의 극대화를 추구하는 자본주의 체계에 전적으로 포섭될 수 없는) 생산 활동이 일어나는 곳”¹²이다. 멀리서 사례를 찾지 않아도 아주 가까이인 대한민국 농업·농촌에 위기가 도래했다. 농촌은 근대의 도시 발전과 함께 많은 인구가 도시로 이동하며 인구가 빠르게 줄고 있다. 더불어 다양한 농업기술의 개발으로 농촌에 많은 사람이 살지 않아도 농산물을 많이 생산할 수 있게 되었다. 농업 생산물에 대한 소득 보장이 어려워¹³ 더욱 빠르게 농촌의 공동화(空洞化)는 진행된다.
농민은 근대 이후 농가 바깥의 행위자(농약 회사, 금융기관, 임노동자) 등에 의존하지 않고서는 농사짓기가 어렵게 되었다. 자본에 의한 ‘이중 쥐어짜기(Double Squeeze)’¹⁴에 의해, 농사짓고만 먹고 살 수 없다는 인식을 주어 청년 농민 수¹⁵는 줄어들고, 농가 인구는 고령화되어 간다. 더 이상 외국인 이주노동자의 손을 빌리지 않으면 농사짓기 어려운 상황이 현실이다.
이와 더불어 식량 자급률도 지속적으로 하락하고 있다. 주요 먹거리인 곡률 자급률은 2021~2023년 기준 19.5%이다. 근미래에 큰 위기가 닥쳐 식량 수입이 어렵다면, 먹거리 공급에 큰 영향이 생길 수도 있다는 것이 예측 가능하다. 하지만 대다수의 사람은 농업·농촌의 현실에 대해 잘 모른다. 농업·농촌은 식량 생산 기지뿐만 아니라 생태 환경, 자연경관 보전 등 공익적 역할을 맡고 있다. 하지만 이런 역할을 떠나서, 농촌은 삶의 터전이다.
‘농민 농업’을 실천하는 주체인 ‘새로운 농민’은 지역사회를 위한 공동활동을 실행하고, 자연을 재생산하며 인간과 비인간 생물의 지속가능한 삶을 위한 다양한 활동을 펼친다.¹⁶ 농민 농업의 실천에는 다양한 행위자가 존재해 그 속에서 이질성과 논란, 그리고 농민의 자율성이 생긴다. 농민 스스로 농장 외부 세계와 연결되는 동시에 적대적인 환경에서도 자신을 보호하는 다양한 분야와 협력하며 ‘다기능 농업(mutifunctional agriculture)’¹⁷을 실천한다.

조르주 디디-위베르만(Georges Didi-huberman)에게는 민중을 노출하는(expose) 것은 어떤 활동에 그들을 ‘참여시키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들 자신이 ‘스스로 참여하는’ 것이고, 그들을 향해 움직이는 것이고, 형상을 만드는 그들의 방식과 대면하는 것이고, 발언하는 그들의 방식에 집중하는 것이고, 삶과 대결하는 것”¹⁸을 말한다. 이러한 방식은 누군가 추동해야만 하는 것이 아니다. 이전부터 활동해 왔지만 결핍노출 되거나, 과잉노출 되었을 뿐이다.
로르바케르와 JR은 이러한 민중을, 새로운 농민을 화면에 노출시킨다.

추도 연설은 네 가지의 말을 빌려와 낭독된다. 이탈리아의 영화감독인 피에르 파울로 파졸리니(Pier Paolo Pasolini, 1922~1975), 미국의 생물학자인 레이첼 카슨(Rachel Carson, 1907~1964), 그리스의 시인 디노스 크리스티나노풀로스(Dinos Christianopoulos, 1931~2020), 그리고 지역 단체인 comunità rurale diffusa의 말이다. 이들은 앞서 이야기한 농업·농촌에 닥친 문제를 발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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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의 동물과 곤충 사이에서 함께 살아가기 위해 울타리를 짓고, 양치기와 양떼가 그늘에서 쉴 수 있도록 나무를 심고, 자신들이 먹을 음식을 오염시키지 않았던 이름 없는 농민을 위해, 우리는 기도합니다.”
“씨앗을 지키고, 지식을 팔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누기 위해 소중히 간직한 모든 이름 없는 농민을 위해, 무엇보다도 가장 위대한 선물인 생물다양성을 보호하고 물려준 모든 농민을 위해, 우리는 기도합니다.”
“어려움과 가난을 위해 투쟁하면서 동시에 지구의 비옥함과 아름다움, 그리고 그 매혹적인 경관을 보호한 모든 농민을 위해. 사람과 자연 사이의 조화가 가능하다는 것을. 그리고 그 조화가 금전적인 이득으로 모든 자원을 파괴하는 데 기반을 두지 않는다는 증언을 위하여. 역사 속에서 모욕당하고, 착취당하고, 부당한 취급을 받은 모든 농민, 여성과 남성을 위하여. 우리는 기도합니다.”
“농산업과 대기업이 집약적인 단일경작 행위로 이용하고, 지구를 자신의 소유물로 여기고, 수탈하고 오염시키면서, 농민 농업은 살해당했습니다! 비즈니스맨과 투기꾼은 지구를 채석장처럼 사용하며, 물과 공기를 오염시켰고, 농민 농업은 살해당했습니다! 정치인들의 부패와 탐욕, 통치자들의 무지와 방치, 그리고 이를 알지만 침묵한 사람들로, 농민 농업은 살해당했습니다! 어느 날 당신이 이를 찾으러 돌아올 것입니다. 당신이 아무런 대가 없이 수 천 년 동안 이어져온 그 귀하고 사심 없는 일을 이해하게 될 때 말입니다. 그러나 그때는 아무 것도 찾을 수 없을 것입니다. 침묵의 봄만이 남을 것입니다.”


묻는다는 행위

추도 연설은 파솔리니의 말을 빌리며 시작한다. “조상의 세계가 소진되고, 모든 농민과 장인이 죽었을 때, 반딧불이, 벌, 나비 등이 더는 없을 때, 산업이 생산의 고리를 중단하지 못하게 할 때, 우리의 이야기는 끝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이야기는 끝났습니다”라고 말하며 거대한 농민의 사진을 땅에 묻는다. 하지만 파솔리니는 말했다. “앞의 문명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파묻힌 것뿐이다. 그러므로, 농민 문명은 노동자의 세계 아래, 산업 문명 아래 묻혀 남아 있다.”¹⁹ 〈오멜리아 콘타디나〉는 파솔리니의 언어를 영화적인 행동으로 엮어낸 셈이다. 둘은 이야기가 끝난 이들의 이야기가 발화될 수 있도록, 문명의 파묻힘을 볼 수 있도록 카메라를 들고 장례식을 촬영한다.
장례식이 다 끝난 후, 첫 쇼트에서 장례의 시작을 알린 중년 남성이 다시 한번 등장한다. 그러고선 말한다. “당신은 우리를 묻었지만, 당신은 우리가 씨앗이었다는 것을 모릅니다”라고. 이 말은 파묻힌 몸이 씨앗으로 발아해 모습을 다시 드러나는 변증법적 발화가 된다. 앞서 말한 것처럼 파솔리니는 농민 문명이 산업 문명 아래 묻혔지만 여전히 남아 있다고 말했다. 또, 벤야민(Walter Benjamin, 1892~1940)은 ‘이야기꾼’의 이야기가 곡식 알갱이와 닮았다고 적는다. “그 이야기는 수천 년간 공기와의 접촉이 없이 피라미드 속 밀폐된 방들 속에 있었으면서도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그 발아력을 간직해온 곡식 알갱이들과 닮았다.”²⁰
이 영화는 묻힌 것을 발굴하는 고고학적 행위가 아니라, 묻힌 것이 다른 존재와의 접촉을 통해 싹이 되어 자라는 생물학적 행위와 더욱 가깝다. ‘묻다’라는 동사는 한국어로 세 가지 의미가 있다. 이 영화를 빌려 이야기하자면 이렇다. 첫째는 거대한 농부의 사진이 땅에 묻히듯 무언가를 보이지 않게 흙이나 물건 등으로 그 위를 덮는 행위, 둘째는 이 영화의 뜻이 무얼까 질문하는 것처럼 어떠한 것을 밝히거나 알아내기 위한 행위, 셋째는 영화의 장면이 오래 기억에 남는 것처럼 흔적이 여기저기 달라붙어 형체를 만드는 행위. 〈오멜리아 콘타디나〉는 이 세 가지의 ‘묻다’라는 행위를 수행한다. 추도 연설은 먹거리 제국에 대항해 새로운 관개체적(transindividual) 활동을 만들어가는 농민 조직(comunità rurale diffusa)의 발화로 진행된다. 그들의 땅은 자신의 몸을 묻는 장소이자, 자신의 위치를 묻는 장소이자, 씨앗이 발아할 터전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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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기를 뻗는다는 것, 발화한다는 것

마이클 마더(Michael Marder)는 아나이스 통되르(Anaïs Tondeur)가 방사능에 쬐인 체르노빌의 식물을 포토그램 기법으로 촬영한 사진에 이런 말을 덧댄다.
식물은 “햇빛을 향해 줄기를 뻗고, 뿌리 내리기 위해 흙 속으로 파고드는” 이중의 운동을 수행한다. 그러므로 “싹을 틔우는 순간부터 식물은 이미 자신을 벗어난 존재”이며, 그 삶은 “단순히 노출된 ‘상태’가 아니라, 노출 그 자체이며 외부성(externality), 곧 바깥으로 향하는 존재성”²¹이다. 이 말처럼, 당신은 몰랐던, 씨앗인 ‘우리’는 뿌리 내리기 위해 흙 속으로 파고들고, 햇빛을 향해 줄기를 뻗으며 생산과 재생산을 계속해서 반복할 것이다. 육체는 거름이 되어 함께 묻힌 씨앗을 싹틔우게 한다. 씨앗은 혼자서는 싹을 틔우기 어렵다. 바람과 비, 흙과 미생물 등 수많은 바깥과 접촉하며 자라난다. 파묻힌 농민 역시 수많은 세계와 접촉하며 뿌리를 내리고 줄기를 뻗고, 생장이 끝나면 다음 세대로 향하는 열매와 씨앗을 맺는다. 당신이 모르는 새에, 그리고 과거에도, 현재에도, 앞으로 닥칠 미래에도.
나는 농촌에 대해 해야 할 말이 있다고 늘상 생각했고, ‘해야 할 말’이라는 언술에 기대어 그것이 무엇인지 똑바로 직시하지 않으려 했다. 또한 해야 할 말을 하는 순간에 대상을 ‘대상화’시킨다는 공포를 느껴 입을 다물곤 했다. 삶터인 농촌을 부정적으로 보는(혹은 낭만적으로 보는) 시선을 부정하기만 했다. 말해야만 한다는 영화, 책, 담론, 현상, 뉴스, 그리고 나의 일상생활을 파편적으로만 붙잡으며, 시공간의 복잡성을 말하기를 포기했다. 이러한 포기를, 자신의 입으로 자신의 문제를 말하기, 그리고 다른 말을 빌려 말하기를 시도하는 농촌 주민의 추도 장례를 농촌 도서관 안에서 지켜보며, “열린 질문으로서의 공통의 장소가 저절로 생겨난 해결책으로서의 상투어로 쇠퇴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겠다는 이 기본적인 정치적 책임을 우리 시선에, 우리 시선의 의지에 부과해야 한다”²²는 디디-위베르만의 선언을 떠올렸다. 더 나아가 시선의 의지보다 중요한 것은 발화의 위치에서 발화하는 방법을 깨닫는 것 일테다. 타자에 의해 재구성된 조건 위에서 발화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위치에서 발화하기. 어디에서 어떻게 말할 것인지를 고민하는 것.
인류가 맞이할(또는 맞이하고 있는, 아니면 벌써 맞이한) 이미지와 현실이 파국이라면, 그러한 파국을 맞이할 역사의 매 순간이 “메시아가 들어올 수 있는 작은 문”이자, 역사적 방법이 “씌어지지 않은 것을 읽기”²³라면, 스러져 버려진 것에서, 들리지 않는 말 속에서, 파편 속에서 넝마주이는 무엇인가를 찾아 비상 브레이크를 밟으려 각자의 자리에서 노력할 것이다. 그것이 실패하든, 실패하지 않든. 자신의 위치에 서서.



  1. 존 던, 『명상 17(Meditation XVII)』(엘렌 식수, 『야아이! 문학의 비명』, 워크룸프레스, 이혜인 옮김, 2022년, 34~35쪽에서 재인용.).

  2. 알리체 로르바케르는 〈더 원더스〉와 〈오멜리아 콘타디나〉의 배경인 이탈리아 중부의 움브리아(Umbria)에서 자랐다. 아버지는 독일인으로 양봉업자이며, 어머니는 이탈리아인이다. 〈더 원더스〉는 로르바케르의 어린 시절을 일부 담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여전히 움브리아에서 살며 영화를 찍고 만들고 있다.

  3. 오멜리아(Omelia)는 ‘설교’, ‘강론’, 콘타디나(Contatina)는 ‘농민의’, ‘소농의’ 등의 뜻이다. 직역하자면 ‘농민의 강론’ 정도로 옮길 수 있다.

  4. 이들은 라치오, 토스카나, 움브리아에 사는 주민들이 모여 만든 단체인 ‘comunità rurale diffusa’에 소속되어 활동한다. 이 단체는 2017년 설립되었고, 지역 주민들이 안정적인 방식으로 관계를 맺고, 소농들의 네트워크를 조직하며, 생산한 농산물을 파는 시장을 토요일마다 개최한다. 또한 헤이즐넛 단일 재배를 반대하는 투쟁을 이어오고 있다. (https://www.puntarellarossa.it/2020/08/07/comunita-rurale-diffusa/)

  5. 이탈리아는 세계에서 두 번째로 헤이즐넛을 많이 생산하는 나라이다. 전 세계 생산량의 12%를 차지한다.

  6. 알리체 로르바케르는 2019년 3월 초에 움브리아와 라티움 주민이 모여 대규모 단일 재배를 중단하려는 ‘문제의 핵심(I NOCCIOLI DEL PROBLEMA)’ 모임에 참여해 행사를 소개하며 주민 및 농민과 함께 했다. (유튜브에서 그 날의 영상을 볼 수 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2eapuY2Af44)

  7. 알리체 로르바케르. (출처: https://www.jr-art.net/news/omelia_contadina)

  8. 알리체 로르바케르의 〈행복한 라짜로〉 사운드 트랙을 만들고 연주하기도 했다. 이들은 지금은 거의 사라진 들판의, 수확 때의, 육체노동의, 해질녘 술집에 담긴 농민 문명의 노래를 잇고자 노력한다. (banda g. verdi di castel giorgio by compagnia de la panatella, in memory of friend flavio polegri (trombone))

  9. 단일경작은 한 경작지에서 한 가지 작물이나 품종을 재배하는 방식이다. 거대한 땅에 같은 식물이 자라니 농기계 사용하기나 농약 주기가 편해 효율이 높고 비용을 절감할 수 있다. 보통 넓은 규모의 땅에서 이뤄진다.

  10. 하지만 영화 ‘설국열차’에서 나온 바퀴벌레로 만든 단백질 블록처럼 지구 생태계의 멸망 이후에도 인간은 생존을 위해 먹거리가 필요할 것이다. 바퀴벌레도 먹히기 위해 길러지거나 사냥당했을 터이다.

  11. 이 제국은 또한 과거 2차 세계대전 시기 군수산업으로 돈을 벌던 기업이 이후 현대화된 기술을 농업에 이중 사용하고 있다. 자세한 내용은 후지하라 다쓰시의 『전쟁과 농업』(최연희 옮김, 따비, 2020)에서 읽을 수 있다.

  12. 박영선, 「다시 던지는 질문」, 『마을』 8호, 마을학회 일소공도. 2021, 7쪽.

  13. 2022년 농업 소득은 농가당 948만5,000원으로 20년 만에 최저치다. 정부는 이에 대한 대응으로 농업 직불금을 내놓았지만 이는 충분하지도 않을뿐더러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근본적인 해결 방안은 아니다.

  14. 높은 생산 가격, 낮은 생산물 가격을 의미한다. 김정섭, 〈농업·농촌의 삼중三重 위기〉, 대산농촌, 2022.

  15. 2020년 기준, 100만 농가 중 경영주가 40세 미만인 농가는 1%(1만 가구)쯤이다.

  16. 얀 다우 판 더르 플루흐, 『새로운 농민』, 김정섭 옮김, 한국농정, 2019. 참고.

  17. 한국에서도 ‘농업환경보전프로그램’(농림축산식품부)처럼 국가 사업과 함께 지역 주민들이 자신의 지역사회를 위해 농업환경(논밭, 마을길, 저수지 둘레 등)을 보다 환경적으로 보전하는 활동을 벌인다. 또 ‘사회적 농업’(농림축산식품부, 현 ‘돌봄농업 활성화 지원사업’)처럼 사회적 약자와 지역사회에서 함께 살기 위해 지역주민이 집합적 활동을 벌일 수도 있다. 이들은 정부 주도 사업이기도 하지만, 그 이전에 새로운 상상력을 펼치며 꾸준히 지역사회에서 이러한 활동을 해왔기 때문에 정부 사업으로도 이어질 수 있었다.

  18. 조르주 디디-위베르만, 『민중들의 이미지』, 여문주 옮김, 현실문화, 2023, 252쪽.

  19. Olmi and Pasolini: Industrialisation, the underdog and ‘ecological eschatology’ in Manon finestra 2 (1956) and Grigio (1957)에서 재인용. (원문은 Duflot J (1999) Il sogno del centauro. Incontri con Jean Duflot [1968–1971]. In: Siti W and de Laude S (eds) Saggi sulla politica e sulla società. Milan: Mondadori, pp. 1401–1550.)

  20. 발터 벤야민, 「이야기꾼」, 『서사·기억·비평의 자리』, 최성만 옮김, 도서출판 길, 2021, 428쪽.

  21. 아나이스 통되르, 마이클 마더, 『체르노빌의 식물 표본』, 도요와 호반새 옮김, 텍스트프레스, 2026, 15쪽.

  22. 조르주 디디-위베르만, 위의 책.

  23. 발터 벤야민,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 관련 노트들」,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폭력비판을 위하여/초현실주의 외』, 최성만 옮김, 도서출판 길, 2008. 참고.


사진 및 스틸컷 출처 JR 홈페이지.

https://www.jr-art.net/projects/omelia-contadina-castel-giorgio



글. 김세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