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는 이미지

944년, 한 성유물이 에데사를 떠나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도착한다.

그것은 오늘날 만딜리온(Mandylion)¹이라고 불리는 천으로, 에데사의 왕 아브가르(Abgar)의 병을 치유하기 위해 예수로부터 전달되었다고 전해지며, 천 위에는 그리스도의 얼굴이 남아 있다고 믿어져 왔다.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남겨주신 그분의 유물 가운데 가장 놀라운 것은 제지레(Jezireh) 지역의 아르루하(ar-Ruha), 즉 에데사의 교회에 있는 한 장의 천이다. 그리스도께서 이것으로 얼굴을 닦으셨고, 그 위에 선명한 형상이 고정되었다.²
위의 글에서 알 수 있듯이, 만딜리온은 사람이 직접 그림을 그려 만든 것이 아니라고 여겨졌다. 비잔틴 문화에서는 이러한 이미지를 아케이로포이에토스(acheiropoietos), ‘인간의 손으로 만들지 않은 것’이라고 불렀고, 사람이 그리지 않았다는 믿음은 성화에 특별한 권위를 부여했다.
그러나 훗날 만딜리온 전승으로 발전하는 아브가르 이야기의 가장 이른 기록에는 얼굴 대신 편지가 있었다.
4세기 초의 기록에서 에데사의 왕 아브가르는 예수에게 병을 고쳐달라는 편지를 보내고 예수는 이에 답한다(『교회사』). 이후에는 아브가르가 보낸 기록관 하난(Hanan)이 예수의 모습을 보고 초상을 그려 왕에게 가져왔다는 이야기가 나타나고(『아다이의 가르침』), 시간이 흐르면서 사람이 그린 초상마저 사라진다. 사절이 예수의 모습을 그리는 대신 예수가 얼굴을 씻은 뒤 천으로 닦자, 그 위에 형상이 남는다(『타대오 행전』).³
편지는 그림이 되고, 그림은 흔적이 된다. 전승이 거듭될수록 이미지의 기원은 그것이 가리키는 몸에 가까워져, 누군가가 예수를 보고 그린 초상은 어느 순간 예수의 몸이 직접 남긴 흔적이 된다. 사람들은 그 흔적을 간직했다고 믿은 천을 옮기고, 보이고, 기록하고, 보존했다. 1204년 제4차 십자군의 콘스탄티노폴리스 약탈 이후 만딜리온의 행방을 더 이상 추적할 수 없게 되었지만, 그것을 향하던 시선은 사라진 물체의 자리를 대신한다.
연도 미상의 6월 7일 새벽, 보르헤스의 소설 속 한 술집에서는 20센타보짜리 동전이 한 사람의 손에 들어온다.
보르헤스의 단편 「자히르」⁴에서 등장인물은 술값의 거스름돈으로 받은 동전—자히르라고 불리는—하나를 좀처럼 잊지 못한다. 그는 동전에 대한 생각을 떨쳐버리기 위해 다른 술집에서 그것을 써버린다. 그러나 동전은 그의 손을 떠났는데도 계속해서 그의 주의를 차지하고, 그는 그것을 생각하지 않으려는 방식으로 다시금 그것을 생각한다.
나는 그 말을 어떤 사실, 즉, 하느님에게 몰두하기 위해서 수피교도들은 자신들의 이름이나 아흔아홉 개의 신성한 이름들이 더 이상 아무런 의미를 갖지 않을 때까지 그것들을 되풀이한다는 것과 연결시킨다. 나는 그 길을 걷고자 염원한다. 아마도 나는 쉬지 않고 자히르를 생각하고 또 생각하면서, 그것이 닳아 없어지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면 아마도 동전 뒤에서 하느님을 볼 수도 있을 것이다.⁵
소설 속 보르헤스가 설명하는 ‘자히르’는 아랍어로 ‘눈에 보이는 것’을 뜻하며, 동시에 하느님의 아흔아홉 이름 가운데 하나다.
하나의 물체가 사람의 주의를 점유한다. 그것은 옮겨지고 사라져도, 이미 불러일으킨 시선과 행동마저 거두어 가진 못한다. 어떤 존재의 자명함을 승인하기 이전에, 그것에 붙들려 행위하게 되는 일이 있다.
1143년, 로마 성 베드로 대성당의 기록에는 ‘베로니카(Veronica)’라고 불리는 또 하나의 신성한 천이 등장한다.


이후 베로니카라는 이름을 가진 여성이 십자가형을 향해 가는 예수의 얼굴을 천으로 닦자 천 위에 그의 형상이 남았다는 서사가 나타나고, 로마에서는 베로니카 성유물의 연례 행렬이 제정된다. 13세기 동안 베로니카의 명성은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고, 1300년과 1350년의 성년을 거치며 천 위의 그리스도 얼굴을 본뜬 이미지들이 본격적으로 대량 생산되기 시작한다.⁶
인간이 그리지 않은 이미지를 정교하게 그리는 일.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지지 않았다고—정확히는 만들어지지 않았어야만 한다고—믿어진 이미지야말로 가장 많이 그려진다.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니라는 믿음이 그 이미지의 진실성을 보증하는데도, 바로 그 믿음이 수없이 많은 사람의 손으로 같은 얼굴을 다시 만들게 한다.
여기에서 복제는 원본을 대체하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사라졌거나 보이지 않는 원본의 형식을 계속해서 보존하는 일이 된다. 어떤 얼굴을 반복해서 그리는 동안 사람들은 그것이 애초에 어떤 모습이었는지를 기억하고, 동시에 그 얼굴이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를 만들어간다. 믿음은 이미지의 결과인 동시에 다시 이미지 출현의 원인이 된다.
어느 날 플래너리 오코너의 「파커의 등」⁷에도 예수의 얼굴이 새겨진다.
자기 몸을 끊임없이 문신으로 채워오던 파커는 유일하게 남겨진 신체 부위인 등에 비잔틴 그리스도의 얼굴을 새기기로 마음먹는다.
파커는 오랫동안 당구장 뒷골목에 주저앉아서 자기 영혼을 살펴보았다. 그의 영혼은 사실과 거짓이 뒤얽힌 거미줄 같았다. 그것들은 자신에게 전혀 중요하지 않았지만 그런 생각에도 불구하고 필요해 보였다. 이제 그가 등에 새긴 눈은 복종을 바쳐야 하는 눈이었다.⁸
“이건 우상숭배야! 우상숭배!” 세라 루스가 소리쳤다. “모든 푸른 나무 아래서 우상을 탐하고 있어! 나는 거짓말과 허영은 참을 수 있지만 이 집에 우상숭배자는 원하지 않아!” 그러더니 빗자루를 들고 그의 어깨를 때리기 시작했다.
파커는 너무 놀라서 저항할 생각도 하지 못했다. 가만히 앉아서 빗자루를 맞았고, 마침내 정신이 혼미해지고 문신한 그리스도의 상 위로 흉터가 부풀어 올랐다.⁹
한 사람은 그리스도의 얼굴 앞에서 변화하고, 다른 사람은 그 얼굴의 뺨/등을 갈긴다. 여기서 누구는 신자이고 누구는 신자가 아닌지, 누구는 불경하고 누구는 경건한지를 가르는 일은 힘이 없다. 이때 믿음은 어떤 명제를 참이라고 여기는 정신의 상태에 머물기보다, 이미지와 사람 사이에서 발생하는 여러 양상의 행동과 밀접해진다.
믿음은 이미지 앞에 머물게 하고, 복종하게 하고, 때리고 울부짖게 한다.
1898년, 사진가 세콘도 피아(Secondo Pia)가 토리노 수의를 처음 촬영하면서 한 사람의 흔적을 또렷이 본다.


토리노 수의는 이탈리아 토리노에 보존되어 있는 거대한 아마포 천이다. 천의 앞뒤에는 수염이 있고 벌거벗은 한 남자의 정면과 후면 형상이 매우 희미하게 남아 있다. 육안으로는 불분명했던 모습이 피아가 촬영한 사진 건판의 네거티브에서 보다 선명한 얼굴과 몸의 형상으로 나타났다.¹⁰ 몸 곳곳의 얼룩은 십자가형을 당한 사람의 상처와 연관 지어 해석되어 왔고, 그 때문에 오랫동안 이 천이 십자가에서 내려진 예수의 시신을 감쌌으며, 그 몸의 흔적이 천 위에 남은 것이라는 믿음의 대상이 되어왔다.
만딜리온과 베로니카에서는 ‘접촉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이미지를 진짜로 만들었다면, 토리노 수의에서는 실제 천과 흔적이 있고, 사람들은 그 흔적으로부터 접촉의 사건을 추론한다. 한때 어떤 몸이 이 천과 닿았다는 사건이 작은 물질적 차이들로부터 재구성된다.
흔적에서 몸을 보고, 몸에서 접촉을 생각하고, 접촉에서 다시 하나의 과거를 구성한다. 이때 이미지의 진실성을 마련하는 근거는 단순한―신과의―닮음에만 있지 않다. 무엇인가 실제로 이곳에 있었으며, 지금 눈앞의 것이 그것과 물질적으로 이어져 있다는 감각. 즉 접촉과 전승, 물질의 지속이 서로 얽혀 하나의 사건을 과거에 놓는다.
1988년 토리노 수의에서 채취한 시료를 가지고 세 연구소에서 수행한 방사성탄소연대측정은 아마포의 연대를 서기 1260~1390년으로 산정했다.¹¹ 그것이 실제 예수의 수의가 아닌 중세에 나타난 물건이라면, 믿음에 관한 질문은 다른 방향으로 움직인다. 토리노 수의는 역사적 예수의 몸을 증명하는 과학적 물증으로서는 효력이 없지만, 사람들이 믿음의 이미지와 흔적과 현존을 어떤 방식으로 서로 연결해왔는지를 보여주는 물질적 양식으로서 유효해진다.
연도 미상의 1월 중순쯤,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 속 화자는 「벽 위의 자국」¹² 하나를 본다.
그녀는 그것이 무엇인지 곧장 확인하는 대신 희미한 자국을 보면서 그것이 무엇일 수 있는지에 관해 생각한다. 그 자국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동안 그것에 앞서 있었을 사건과 사물들은 계속해서 불어난다.
아니, 아니, 입증된 것도 없고, 알려진 것도 없다. 만일 내가 바로 이 순간에 일어서서 벽 위의 자국이 실은―뭐라고 말할까?―엄청나게 큰 낡은 못대가리라는 것을 확인한다면, 이백 년 전에 박힌 못이 많은 세대에 걸쳐 끈기 있게 문질러 닦은 하녀들의 노고 덕분에 이제 페인트 칠 위로 대가리를 드러내고 흰 벽에 난롯불 빛이 비치는 방을 보면서 처음으로 현대의 삶을 감상하고 있다면, 내가 무엇을 얻게 될까? 지식을? 더 숙고할 문제를?¹³
수의와 벽의 자국은 물론 같은 종류의 흔적이 아니다. 다만 둘 사이에는 흔적이 언제나 그것을 만들어낸 사건을 온전한 모습으로 데려오지 못한다는 사실이 놓여 있다. 흔적은 무엇이 있었다는 사실과 그것이 사실상 무엇이었는지를 같은 강도로 말해주지 않는다. 그래서 사람은 남아 있는 것에서 사라진 것을 보고, 현재의 물질로부터 과거의 접촉을 생각하며, 그 사이를 이야기로 이어 붙인다.
만딜리온은 옮겨졌고, 베로니카는 복제되었으며, 토리노 수의는 촬영되었다. 누군가는 그리스도의 얼굴을 새기고, 누군가는 같은 얼굴 앞에서 울거나 그것을 때린다. 손을 떠난 동전은 보이지 않게 된 뒤에도 한 사람의 생각을 점유하고, 벽 위의 작은 자국은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동안 이미 사라진 것들을 거듭 불러온다.
이미지와 이야기와 믿음이 서로를 ‘진짜’로 만들어준다. 이는 서로가 서로의 진위 판별을 용이하게 하여 그것을 입증하거나 부정한다는 뜻에서의 진짜가 아니라, 세계 안에서 지속되고 작동하며 실재하도록 만든다는 뜻에서의 진짜다. 이야기는 어떤 사물을 찾아가고 옮기고 보존하게 하며, 그렇게 남아 있는 사물은 다시 이야기에 물리적인 무게를 준다. 이미지는 복제되면서 더 많은 시선을 불러들이고, 그 시선과 행동은 다시 이미지가 지속되는 조건이 된다.
모든 기적과 흔적의 사실 여부를 확인할 수는 없지만, 믿는 일이 세계에 남기고 있는 것을 종종 알아차릴 때가 있다. 남아 있는 이미지와 생겨나는 이미지가 있고, 이동한 물(신)체와 이동 중인 물(신)체가 있으며, 기록되고 복제되고 겸허해지고 남루해지는 이야기들과 그것들을 언제라도 다시 마주하게 될 현재의 시선들이 있다.
믿음은 다시 보게 하고, 찾아가게 하고, 옮기게 하고, 만지게 하고, 만들게 하고, 보살피게 하고, 파괴하게 한다.
믿음과 그것의 성스러움이 진실하다면, 성스러운 믿음에 실재성이 있다면, 그것은 믿는 대상인 이미지나 믿는 자의 내면에 부여된 것이 아니라, 세상과 사람 사이에서 추동되고 갱신되는 행위 가운데 있는 것이 아닐까. 여기 명확한 무언가가 있다. 실재하는 무언가가.¹⁴
‘만딜리온’은 비잔틴 그리스어 μανδήλιον으로, ‘수건’ 또는 ‘천 조각’을 뜻한다. 오늘날에는 에데사에서 전해졌다고 여겨진 그리스도의 성상을 가리키는 명칭으로 통용된다.
에우티키우스(Eutychius), 『논증의 책The Book of the Demonstration』, Averil Cameron, “The History of the Image of Edessa: The Telling of a Story,” Harvard Ukrainian Studies 7, 1983, 90쪽에서 재인용. 한글 번역 필자.
Averil Cameron, “The History of the Image of Edessa: The Telling of a Story,” Harvard Ukrainian Studies 7 (1983): 80~94쪽, 특히 81~83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Jorge Luis Borges), 『알레프Aleph』, 민음사, 2012
같은 책, 147쪽.
Gerhard Wolf, “From Mandylion to Veronica: Picturing the ‘Disembodied’ Face and Disseminating the True Image of Christ in the Latin West,” in The Holy Face and the Paradox of Representation, ed. Herbert L. Kessler and Gerhard Wolf (Bologna: Nuova Alfa Editoriale, 1998), 167–169쪽.
플래너리 오코너(Flannery O’Connor), 『플래너리 오코너Flannery O’Connor』, 현대문학, 2014
같은 책, 709쪽.
같은 책, 713쪽.
Peter Geimer, “A Self-Portrait of Christ or the White Noise of Photography? Paul Vignon and the Earliest Photograph of the Shroud of Turin,” Grey Room 59, 2015
P. E. Damon et al., “Radiocarbon Dating of the Shroud of Turin,” Nature 337, 1989, 611–615쪽.
버지니아 울프(Virginia Woolf), 『버지니아 울프Virginia Woolf』, 민음사, 2022
같은 책, 49쪽.
같은 책, 51쪽.
이미지 출처
(1) 작가 미상, 에데사의 아브가르 5세 왕과 만딜리온 성화, 10세기, 이집트 성 카타리나 수도원 소장
(2) 프란시스코 데 수르바란(Francisco de Zurbarán), 〈성스러운 얼굴The Holy Face〉, 1658, 스페인 국립조각박물관 소장
(3) 알브레히트 뒤러(Albrecht Dürer), 〈두 천사가 받쳐 들고 있는 수건The Sudarium Held by Two Angels〉, 1513
(4) 마티아 프레티(Mattia Preti), 〈성녀 베로니카의 베일Saint Veronica with the Veil〉, 1652~1653년경,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미술관 소장
(5) 세콘도 피아(Secondo Pia), 〈토리노 수의의 전신 음화 사진Full-length photographic negative of the Shroud of Turin〉, 1898
(6) 토리노 대성당 아카이브 / Wikimedia Commons
글. 유명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