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하는 사람들: 로베르트 발저, 〈산책〉

누구나, 문득 산책에 나서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산책하기는 육신을 직접적으로 만나볼 수 있는 길이자, 살아있음을 자각할 수 있는, 가장 단순하면서도 늘 신선한 체험이다. 몇 시간이라는 아주 긴 형식의 산책도 몇 분간의 아주 짧은 산책도, 기회만 주어진다면 육체가 몸담은 장소의 내피와 외피를 눈앞의 시공간으로 흥미진진하게 펼쳐 보일 수 있는 일종의 모험이다. 산책은 일상의 흐뭇한 숨소리를 직접 들어볼 수 있는, 그다지 튈 것 없는 수수한 시간이기도 하다. 정처 없이 발걸음을 떼는 어떤 산책은 목적지에 당도하는 것만이 늘 중요하지 않고 오히려 그곳에 당도하기까지 잠시 느슨해진 삶의 리듬을 감각하는 것만으로 아주 충분하다. 그리고 어떤 산책은 아주, 자주 작아지는 일, 그렇게 작아진 채로 작은 선언을 해 나가는 일과 닮아 있다.
로베르트 발저가 그리는 산책하는 발걸음의 즉흥적인 궤적에는 엄밀한 규칙이나 구조를 발견하기 어려운, 기묘하고도 신비로운 박자감이 있다. 한국에서 펴낸 선집 『산책자』에 마지막으로 실린 산문 〈산책〉을 들여다보면 다음과 같은 세세한 공간이 산책자의 주의를 끌고 있다.
—책방, 은행, 빵집, 주물공장, 모자가게, 정육점, 향신료가게, 술집, 채마밭, 과수원, 콩대와 관목, 호밀과 귀리와 밀이 빼곡히 펼쳐진 들판, 목재 하치장, 풀밭, 개울과 강, 시냇가, 각양각색의 사람들, 한 그루의 작은 사과나무, 그 밖의 모든 사물들, 전나무 숲길, 어느 집의 1층 창가, 애비 부인의 집, 우체국, 양복점, 세무서, 시골 이발소, 구둣방, 학교 건물, 새카만 개 한 마리, 신사, 여자 일꾼, 어느 아늑하고 조용한 뒷길—
친숙한 개체가 돌연 시야를 채우고, 장소는 하나의 피조물화된 유닛이 되어 풍경의 이미지 안에서 잠시 살아 있는 생명체가 된 것만 같다. 산책을 하는 동안 분주히 삶의 터전을 오가는 사람들의 소리가 들려오고, 지각의 경계를 넘어 튀어나온 향기가 비로소 코끝에 닿는다. 발저의 산책은 물리적으로 멀리 나아가지 않고서 일상의 테두리를 맴도는, 그의 삶에서 꽤나 없어서는 안 될 시간이다. 산책은 정말로 멋지고 좋은 것이면서, “좀 괜찮은 부랑자처럼, 그런대로 단정해 보이는 노숙자 혹은 할 일 없이 빈둥대는 놈팡이처럼, 일정한 거주지 없이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행려자처럼”¹ 길 위를 걷는 시간이다. 이렇게 산책을 하는 동안 머릿속에는 여러 가지로 멋진 발상이 떠오르는 등 기분이 무척 좋아진다는 것을, 산책이 삶에 있어 ‘무조건’ 필요한, 살아 있음을 보증해 주는 수단이라는 것을 그는 산문들 속에서 숨김없이 기쁘게 드러내고 있다.
발저는 1878년 스위스 베른 주의 독일어권 지역과 프랑스어권 지역의 경계인 빌Biel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경제적 어려움으로 14세에 예비 김나지움을 마치지 못하고 학업을 중단하였다. 어렸을 때부터 연극을 좋아했으며, 특히 프리드리히 실러의 희곡에 큰 관심을 가졌다. 그는 베른 주에서 은행에서 견습으로 일하기 시작해, 독일 슈투트가르트로 건너가 출판사에서 서기로 일하고 이후에는 고무 공장의 노동자로 취직해 돈을 벌면서 연극배우가 되기를 희망했다. 그의 꿈을 이루기에는 현실이 녹록지 않아, 엔지니어의 조수로 일을 하거나 하인 학교에 등록하여 정식 하인 교육을 수료하는 등 여러 분야를 전전하면서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이후 소설 『조수(Der Gehülfe)』(1908), 『야콥 폰 군텐 혹은 벤야멘타 하인학교(Jakob von Gunten)』(1909) 등을 썼다. 발저의 시와 산문은 1989년 베른의 신문 존탁스블라트 데스 분데스(Sonntagsblatt des Bundes)에 실리기 시작했으며, 이후 출판사 인젤(Insel Verlag)에서 첫번째 책 『프리츠 코헤르의 작문(Fritz Kocher's Aufsätze)』(1904)이 출간되었다.
로베르트 발저의 문학 작품을 살펴보기 위해, 독문학자들은 그의 작품을 여러 차례 바뀌었던 거주지에 따라 크게 네 세대로 분류하고 있다. 초기 시대(1898-1905), 그의 형이자 화가, 무대미술가, 서적 디자이너이기도 했던 카를 발저와 함께 살았던 베를린 시대(1905-1913), 자신이 태어난 곳이자 아버지가 살고 있던 스위스로 돌아가 거주하던 빌 시대(1913-1921), 베른의 발다우 정신병원에서 은둔하는 생활을 지속하였던 베른 시대(1921-1933)로 집필 시기를 나눈다.
동시대에 활발히 활동하였던 작가들 헤르만 헤세, 로베르트 무질, 발터 벤야민, 크리스티안 모르겐슈테른, 쿠르트 투홀스키와는 대조적으로, 발저에게는 아웃사이더적인 성향이 도드라진다. “그는 어디서나 살았고, 그 어디에서도 살지 않았다.”라는 〈산책(Die Sparziergang)〉(1917) 속 한 문장은 그의 삶을 잘 표현하고 있다. 인간과의 교유만이 희박했던 것이 아니라, 물질과도 늘 거리감을 두며 살아갔던 발저의 문학 작품 또한 대표작 일부를 제외하면 수백 편의 시, 1,500편이 넘는 산문이라는 방대한 양에 비해 공개되거나 출간된 작품의 수가 극히 적어 보인다. 생애 후반부인 베른 시대에 이르러 그는 가장 많은 글을 썼으며, 이때 직접 엮은 단 한 권의 산문집 〈장미(Die Rose)〉(1925)만을 베를린의 출판사 로볼트Rowohlt를 통해 출간했다. 발저는 1929년 베른 근교의 발다우Waldau 정신치료요양원에 보내진다. 요양과 치료를 반복하며 서서히 세계와 고립되어갔던 이 시기, 손의 움직임에서 관찰된 이상 증세를 이유로 그는 연필로 먼저 글씨를 쓰고 나서 펜으로 다시 한번 이중의 필사를 하는, 이른바 연필 체계(Bleistiftsystem)를 고수하기 시작했다. 이때 적힌 총 526장의 원고 뭉치들의 글자가 아주 작았으므로 이에 마이크로그램(Mikrogramme)이라는 이름이 붙여진다.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작은 글씨의 크기, 글씨의 형태로 인해 해독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던 이 원고들은 발저 사후 『연필 영역에서(Aus dem Bleistiftgebiet)』(1968)라는 총 6권의 책으로 출간된다. 2011년, 주어캄프Suhrkamp 출판사는 이 중 33편을 추려 선집 『마이크로그램 Mikrogramme』(2011)으로 만들었는데, 해당 책에서는 68장의 이미지를 1대1 비율로 편집해 넣어 마이크로그램의 실제 원본 크기를 잘 가늠할 수 있도록 했다. 원고 뭉치를 해독했던 베른하르트 에히테는 마이크로그램 특유의 선과 점의 배치를 수년간 꾸준히 읽어 나가는 훈련을 반복했는데, 이를 통해 비로소 마이크로그램을 읽을 수 있는 글자로 식별할 수 있었다는 후기를 전하고 있다.


마이크로그래피(Mikrografie)란 수 세기 동안 필기체로 쓰였던 독일의 쿠렌트체(Kurrentsschrift)로 아주 작게 쓰는 발저만의 독특한 글씨 쓰는 방식을 칭한다. 이중의 필사 시스템은 먼저 연필로 글을 쓰는 동안 주체의 의식이 있는 그대로 흐르도록 두고 그것이 그대로 글쓰기의 내용으로 살아 움직이게 하면서, 펜으로 다시 덧붙여 쓰는 동안에는 쓰인 내용에 대해 수정과 통제를 거치도록 하는 작가로서의 일종의 생산적인 수단이기도 했다.² 발저의 이중 쓰기는 작가란 무릇 글을 쓰는 주체이며, 글을 쓴다는 행위 자체가 체화되어 분리할 수 없는 형식이자 과정을 거치는 것이 글쓰기라는 일의 의미임을 상기하게 한다. 반복에 반복을 더해 어떤 것을 지우고 어떤 것을 더해내거나 변경할 것인지를 일일이 검토하고 곱씹도록 하는 ‘연필 체계’와 눈에 미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아주 작은 글씨로 적는 ‘마이크로그래피’의 결합은 발저가 추구했던 고집스러운 글쓰기의 길을 순수하게 보여준다.
행성을 떠돌듯이 주변의 사물들을 관찰하며 써나가는 자아는 산책하는 자아를 연상시킨다. 발저는 발다우 요앙원에서 헤리자우Herisau 요양원으로 이전한 이후로 봉투를 붙이는 등의 단순한 손작업을 반복하는 일상을 보내면서, 크리스마스 날 눈이 내린 길가 위에서 그가 죽은 채로 발견되기 전까지는 글을 더 이상 쓰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그는 누구보다도 더 많은 산책이 더 많은 감상을, 더 많은 기분을 불러일으킬 것이라는 사실을 믿고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그에게는 더 많은 산책이 더 많은 글쓰기를 만들어 주는, 늘 만나면서도 더더욱 그리워지는 아쉬운 일이었을까? 『산책자』를 번역한 작가 배수아는 로베르트 발저를 “그는 보기 드문, 특별한 수준의 기나긴 산책자였다.”라고 표현한다. 보편의 세계에서 사금을 찾는 것처럼 기쁨을 채취해 내듯 산책하는 그의 글을 읽다 보면 어쩐지 지금 당장 산책에 나서고 싶어진다.
산책을 계속하자! 걷는 일은 참으로 아름답고 기분 좋으며 태고의 단순함을 간직하고 있다.³
로베르트 발저, 『산책자』, 배수아 옮김, 한겨레출판, 2024, 212쪽.
안미현. (2023). 로베르트 발저의 『마이크로그램』 연구 - 생성사 및 텍스트 분석. 독어독문학, 64(3), 125-149.
로베르트 발저, 『산책자』, 배수아 옮김, 한겨레출판, 2024, 206쪽.
글. 정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