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다는 믿음

두 눈을 뜬/든 여자.

흑백의 항공사진 위로 공장의 지붕과 철로, 길고 반듯한 막사들이 놓여 있다. 비행기에서 내려다본 땅은 깊이를 잃고 평평해져, 건물과 사람과 길이 거의 같은 종류의 흔적으로 남는다. 1944년 연합군의 정찰기가 폴란드 상공에서 촬영한 이 사진의 목적은 인근의 IG 파르벤 공장을 확인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아우슈비츠 수용소가 사진 안에 있었다. 가스실과 화장장, 수감자들의 행렬까지 필름의 감광면 위에 흔적을 남겼지만, 당시 사진을 분석하던 사람들에게 그것은 발견되지 않았다.¹ 수십 년이 흐른 뒤 다른 사람들이 같은 사진을 다시 들여다보았을때에야 이미 그곳에 있던 것이 ‘수용소’로 보이기 시작한다.
하룬 파로키(Harun Farocki)의 〈세계의 이미지와 전쟁의 각인 Images of the World and the Inscription of War〉(1988)은 그래서 이미지가 무엇을 상징한다가 아닌, 어떤 것이 어떤 조건에서 비로소 무엇으로 보이게 되는지, 그것이 보이는 순간에 무엇이 부재하고 무엇이 발생하는 지를 추적한다. 사진은 무언가가 그곳에 있었다는 흔적을 품고 있지만, 그 흔적이 스스로 자신의 의미를 결정하지는 못한다. 정찰사진을 들여다보던 눈에 부족했던 것은 시력이나 주의력만이 아니었다. 그들은 공장을 찾고 있었고, 그 목적 아래 사진을 읽고 있었다. 반대로 수 십년 뒤의 눈에게는 이미 아우슈비츠라는 이름과 증언, 도면과 역사적 지식이 도착해 있었다. 무언가를 본 것으로 받아들이는 데에는 눈 앞에 놓인 흔적 이상의 것이 전제된다.
파로키의 영화에서 보기에는 이와 같은 시차가 생긴다. 보았으나 아직 보이지 않았던 것과, 보지 못했던 것을 뒤늦게 알아보는 것 사이에서, 보는 일 자체가 양가적인 사건이 된다. 이때 뒤늦게 다시 본다는 것을 단순히 ‘더 잘 보는 일’이라고 부르기는 어렵다. 사후의 시선은 과거의 시선이 놓친 것을 발견하지만, 동시에 선행하는 지식이나 정보에 맞추어 과거의 이미지를 재조직한다. 아우슈비츠를 아는 시대에는 사진 속 선과 점을 막사와 철조망, 화장장과 사람의 행렬로 읽을 수 있게 된다.
이미지가 처음 생산되었을 때의 앎을 초과해 무언가를 기록해둘 수 있다면, 훌리오 코르타사르(Julio Cortázar)의 「악마의 침 Las babas del diablo」 에서는 그 사후성이 다른 방식으로 작동한다. 화자 로베르토 미셸은 우연히 목격한 장면을 사진으로 찍고, 이후 그 사진을 확대 인화해 다시 바라본다. 현장에서는 알아차리지 못했던 관계가 사진을 통해 뒤늦게 모습을 드러내지만, 그것은 단순히 사진 속에 숨어 있던 진실을 발견하는 일이 아니다. 현재의 시선과 과거의 기억, 사진이 제공하는 단서와 그것을 둘러싼 추론이 뒤섞인다.
“이야기를 하고 있는 진짜 주체가 누구인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에 일이 어렵다. 그 주체가 나인지, 발생한 사건인지, 내가 지금 보고 있는 것(구름과 이따금씩 보이는 비둘기 한마리)인지 알 수가 없다. 어쩌면 그저 나에게만 진실일 뿐인 진실, 그러니까 근질근질한 내 입과 어떻게든 이 일을 끝내고 밖으로 뛰쳐나가고 싶은 욕망에서만 진실일 뿐인 이야기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²
여기서 ‘나’는 이미 지나간 사건을 바깥에서 소유하고 객관적으로 회고하는 안정된 관찰자가 아니다. 이야기를 쓰고 있는 현재의 화자와 과거에 발생한 사건, 지금 눈앞에 있는 사진, 과 그것으로부터 시선을 빼앗는 구름과 비둘기, 그리고 어떻게든 이야기를 끝내고 싶어 하는 몸의 욕망까지 한 문장 안에 뒤섞인다. 과거의 사건이 기억을 불러오는 것인지, 현재의 시선이 과거를 다시 만드는 것인지 쉽게 분리되지 않는다. 충분히 다시 보고 더 많은 단서를 얻는다면 사건이 스스로 하나의 결론을 내보일 것이라는 기대가 무너진다. 사진을 다시 본다는 것은 지나간 사건을 되찾는 일이 아니라, 현재의 나와 과거의 장면 사이에서 ‘내가 본 것’이 다시 성립하는 일이 된다. ‘내가 본 것’이라는 과거형이 발화되는 순간, 그것을 말하는 ‘나’의 현재 위치 역시 함께 흔들린다.
그렇게 다시 보는 일이 확실성을 더해주지 않는다면, 물음을 ‘무엇이 보이는가’에서 ‘보이는 것 앞에서 무엇이면 충분한 확인이 되는가’로 옮겨본다. 이때 확인은 시각이 아닌 다른 감각으로 넘어가기도 한다. 카라바조(Caravaggio)의 토마스(〈의심하는 성 토마스 The Incredulity of Saint Thomas〉, 1601–1602)는 부활한 몸을 눈앞에 두고도 손을 뻗는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지 못한 토마스는 그의 상처를 직접 확인하지 않고서는 믿지 않겠다고 말한다. 카라바조는 이 확인의 요구를 손가락이 그리스도의 상처에 들어가는 순간으로 그렸다. 앞서 사진을 다시 보는 일이 자신이 무엇을 보았는지를 확인하려는 시도였다면, 토마스는 확인의 감각 자체를 바꾼다. 확신의 요구는 더 많은 보기로 이어지는 대신, 보는 것에서 만지는 것으로 넘어간다.
토마스에게 손은, 눈이 충분히 보증하지 못한 타인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 호출된다. 촉각은 시각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시각만으로 확보되지 않은 확신을 보충하려 한다.
그런데 사무엘 베케트(Samuel Beckett)의 영화 〈필름 Film〉(1965)에서 손은 또 다른 이유로 등장한다. 토마스의 손이 다른 몸에 남은 부활의 흔적을 확인하려 한다면, 〈필름〉의 손은 자기 몸을 향한다.

베케트는 작품의 출발점으로 조지 버클리(George Berkeley)의 esse est percipi—‘존재하는 것은 지각되는 것’이라는 문장을 가져온다. 대본은 인물과 카메라를 마치 추상적인 창으로 분해하여 인물은 O(Object), 그를 추적하는 지각자는 E(Eye)로 설정된다.⁵

담벼락 옆에 몸을 가까이 붙인 채 서 있는 한 남성인 O는 보이는 것으로부터 벗어나려 한다. 사람들과 카메라(E)를 피해 거리를 달려 집으로 도망쳐 온 후에도, 시선에서 벗어나기는 계속된다. 방에 있는 거울을 가리고, 창을 가리고, 안구를 가진 고양이와 강아지를 내쫓고, 금붕어가 든 어항을 천으로 덮고, 과거에 찍힌 자신의 사진들을 찢어버린다. 그는 단순히 외부의 시선을 피하는 게 아니라 자신을 자신에게 되돌려주는 모든 반사면을 제거하고자 한다.
그렇게 자신을 보이게 하는 조건들을 하나씩 제거한 뒤 그가 손을 대는 곳은 자신의 손목 아래에서 뛰고 있는 맥박이다. 그가 맥박을 짚는 동작은 시각적 지각을 제거한 뒤에도 끝내 피해갈 수 없는—비시각적—자기 지각처럼 보인다. 그러나 또다시 ‘보인다’로 되돌아가는 문장. 우리(관객)는 그가 맥박을 짚는 동작을 본다. 그가 시선으로부터 달아다는 모습도, 손목에 손가락을 대는 동작도 영화의 이미지가 된다. 보는 것으로부터의 도피는 끝내 보여지는 것으로 돌아온다.

어쩌면 여기에서 글 서두에 등장한 성 루치아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다. 눈은 몸의 기관이면서 몸 밖에 놓여 있고, 보는 사람의 일부이면서 다른 사람이 바라볼 수 있는 사물이기도 하다. 루치아의 그림에서 보는 기관과 보이는 대상의 자리가 한 몸에 겹쳐 있듯, 〈필름〉에서 Eye와 Object로 갈린 두 자리 역시 끝내 완전히 분리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어떤 사건을 두고 ‘나는 그것을 보았다’고 말할 때 실제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어떤 것은 먼저 기록되고 뒤늦게 판독된다. 어떤 것은 다시 보았을 때 비로소 ‘본 것’으로 성립하고, 때로 재차 보려 할수록 무엇을 보았는지 확정하기 어려워진다. 보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은 것을 만져서 확인하고, 시각에서 달아나려는 몸은 촉각에 기대지만, 또 다시 무방비하게 보여진다. 대상도 스스로 의미를 완결하지 않고, 주체도 세계 밖의 절대적인 판독자가 아닌 곳에서, 우리는 서로 다른 시간에서 도착한 감각적 단서와 해석을 연결한 뒤 어느 순간 그것을 ‘보았다’고 말한다. 그때 개입하는 승인을 믿음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보는 행위는 촬영과 판독의 시차, 현장의 지각과 사후의 재인 사이의 어긋남, 시각에서 촉각으로 옮겨가는 확인, 그리고 보는 이가 동시에 보이는 대상이 되는 것과 같은 중첩들 속에서 이루어진다. 본다는 믿음은 그 사이를 임의로 메우는 신념이라기보다, 여러 시간과 감각에 흩어진 순간들을 하나의 ‘본 것’으로 받아들이되, 그 판단을 가능하게 한 조건들의 움직임을 붙들고 있는 일에 가깝다. ‘보았다’는 결단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그것이 어떤 시간과 감각, 지식과 관계를 통과해 성립하고 있는지를 묻는 것. 동시에 언제나 그 판단 너머에, 무심한 세계 또한 있음을 헤아릴 때—그 너머는 우리에게 종종 묘연하여 여기에서도 믿는 일이 요구되기에—믿음은 막연한 승인이 아닌 구체성의 다른 형태를 추구하는 일이 된다.
이 항공사진과 그 판독에 관한 서술은 하룬 파로키의 〈세계의 이미지와 전쟁의 각인〉을 참조했다.
훌리오 꼬르따사르, 「악마의 침」, 박병규 옮김, 『드러누운 밤』, 파주: 창비, 2014, p. 143.
『요한복음』 20:24–29
아일랜드 출신의 철학자이자 성공회 주교로, 근대 경험론을 대표하는 인물 중 한 명이다.
Samuel Beckett, “Film,” in Collected Shorter Plays of Samuel Beckett, New York: Grove Press, 1984, pp. 161–174, esp. p. 163.
이미지 출처
(1) 프란시스코 데 수르바란(Francisco de Zurbarán), 〈성녀 루치아 Saint Lucy〉, 1625-1630. 워싱턴 국립미술관(National Gallery of Art).
(2) 하룬 파로키, 〈세계의 이미지와 전쟁의 각인〉 스틸
(3) 카라바조, 〈의심하는 성 토마스〉, 1601-1602. 상수시 회화관(Bildergalerie von Sanssouci), 포츠담.
(4) 사무엘 베케트, 「필름」, 1963. 『Collected Shorter Plays of Samuel Beckett』, Grove Press, 1984, pp. 161–174에서 발췌.
(5-6) 사무엘 베케트, 〈필름〉 스틸
글. 유명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