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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장소, 장소의 영화-1: 도시를 걷는 세 겹의 시간

2026. 8. 15.

그러나 위험이 있는 곳엔

구원도 따라 자란다.¹


1. 들어가며

붉은 승려복을 입은 행자(行者)가 홍콩의 침사추이 거리를, 해가 떠있는 낮부터 해가 진 밤까지 아주 느리게 걷는다. 카메라 밖에서 안으로, 안에서 밖으로 행인(行人)이 평상시의 속도로 걸어 지나간다. 카메라 앞으로 차가 지나가며 느리게 걷는 행자를 잠깐 가린다. 두 손에는 무언가를 들고, 두 발에는 무엇도 신지 않고 행자는 바닥을 보며 느리게 걷는다. 걷는 일은 몸이 땅을 척도로 삼아 스스로를 가늠하는 방식²이다. 행자는 맨발로 도시의 아스팔트 위를 척도 삼아 자신을 가늠하며 걷는다. travel(여행)의 어원은 travail, 즉 노동, 고통, 출산의 뜻을 가지고 있다. 맨발로 느리게 걷는 행자는 고통을 겪는 노동을 행하며 도시의 리듬과 섞여 또 다른 리듬을 창조한다.

릴케는 시 〈사물의 멜로디에 대한 메모〉에서, “전체 멜로디를 들어 알 수 있는 사람은 가장 고독한 사람이자 가장 공통적인 사람일 것이다”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전체 멜로디를 듣는 사람은 아무도 듣지 못하는 희미한 소리를 듣기 때문이고, 그 희미한 소리를 완전함으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행자는 공통적인 사람이 되어 도시의 소리를 듣는다. 솔닛의 말처럼 순례가 몸의 움직임을 통해 영혼의 믿음과 소망을 표현하고, 정신과 물질을 화해시키는 경계선(limilnality)에 위치해 있다면, 행자의 발은 시간과 공간이 압축된 도시 위를 가로지르며 도시의 리듬과 수행의 리듬을 화해시키고 뒤섞는 방식일 것이다. 이 글은 차이밍량의 영화 〈행자(walker)〉(2012)³에 등장하는 행자의 느린 수행을 근대적 도시 리듬과 어긋나고 또한 합쳐지는 공통적인 것으로 분석하고자 한다. 랑시에르는 서로 낯선 요소들 사이에서 이질적인 요소들이 함께-속함(co-appartenance)을 통해 새로운 은유의 우애가 조합되는 공통의 세계를 증언한다고 보았다. 이런 (신비의) 기계는 서로 다른 세계를 대립시키는 것이 아니라 가장 예기치 못한 방식으로 함께-속함을 연출⁴할 수 있다. 〈행자〉에서의 걷기는 행자, 행인, 그리고 영화를 관람하는 관객의 이질적인 시/공간이 함께-속하면서 공통적인 순간을 일시에 창출한다.

차이밍량과 만주장정 연작

차이밍량은 말레이시아에서 태어나 대만에서 영화 감독으로 활동한다. 1992년 〈청소년 나타(青少年哪吒)〉로 데뷔했고, 이때부터 《행자》 연작에 등장하는 이강생과 함께 영화를 만들었다. 차이밍량은 영화에서 자본주의/현대/대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과 도시의 풍경을 끊임없이 등장시키며 대도시에서의 삶을 그린다. 〈청소년 나타〉, 〈애정만세(愛情萬歲)〉(1994), 〈하류(河流, The River)〉(1996), 〈거기 지금 몇 시인가요?〉, 〈홀로 잠들고 싶지 않아〉 에서는 아파트와 방을, 〈하류〉에서는 목욕탕을, 〈떠돌이 개〉에서는 길거리를, 〈안녕, 용문객잔〉은 폐관을 앞둔 영화관을, 〈거기 지금 몇 시인가요?〉, 〈천교는 보이지 않는다〉에서는 다리를 배회하거나 머무르는 신체를 화면 안에 놓아 둔다. 신체는 거리를 걷고, 길거리에서 물건을 팔고, 빈 아파트에 몰래 들어가 잠을 청하고, 오토바이를 타고 거리를 달리고, 비가 새는 방 아래에서 잠이 들고, 사우나에서 동성 성관계를 맺는다. 도시는 자본순환과 자본 축적의 핵심적 수단으로 소외를 심화하는 배경⁵이 된다. 차이밍량 영화의 신체들은 도시에게서, 타인에게서,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서 소외된 채로 대도시를 배회한다.

차이밍량의 《만주장정(慢走長征)》 연작에서는 대도시의 거리를 걷는 신체가 카메라 앞에 등장한다. 차이밍량은 당나라 시대의 승려 삼장법사를 『서유기』에서 불러 온다. 『서유기』는 잘 알려져 있듯, 삼장법사가 불경을 가지러 서역으로 가는 길에 겪는 고행에 대한 이야기이다. 차이밍량은 1400여 년 전의 삼장법사가 시안에서 인도까지, 황제의 명을 어기고 몰래 국경을 넘어 경문을 보기 위해 걸었던 길을 생각한다. 삼장법사는 삶과 죽음을, 심지어는 목적성을 따지지 않고 사막을 건넌다. 또한 아무 정보도 없이 자신의 걸음에 삶을 의지한다. 차이밍량은 삼장과 ‘행자’라는 영화에는 저항의 정신이 담겨 있다고 말한다. 이 저항의 정신은 “현대 세계의 속도에 대한 저항”⁶이기도 하다.

차이밍량의 〈행자〉는 《만주장정》 연작의 두 번째 작품이다. 시작은 2011년 타이베이 국립극장에서의 〈오직 당신만이〉 공연이다. 처음에는 세 명의 배우를 무대에 올릴 계획이었다. 그 중 한 명이 이강생이다. 차이밍량은 이강생에게 자신이 가장 영향을 많이 받은 세 명의 인물인 이강생, 차이밍량의 아버지, 삼장법사를 연기할 것을 부탁했다. 이강생은 무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무척 느리고 힘들게 걷기 시작했다. 이강생의 모습이 아름답다고 느낀 차이밍량은 공연은 무대에 올리고 난 뒤에는 사라지기 때문에, 그가 걷는 모습을 영화로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한다.

타이베이에서 촬영한 〈무색(無色)〉(2012)을 시작으로, 홍콩의 침사추이, 말레이시아의 쿠칭, 대만 북부의 주앙웨이, 프랑스의 마르세유, 일본의 도쿄, 미국의 워싱턴DC 등 여러 도시를 붉은 옷을 입은 행자가 느리게 걸어가는 장면으로 구성된 영화 연작⁷이다. 2024년에는 10번째인 〈무소주(無所主, Abinding Nowhere)〉를 발표했고, 그해 전주국제영화제를 찾은 차이밍량에게 영화제 측은 11번째 《만주장정》 연작을 전주에서 촬영해볼 것을 제안하기도 한다.

차이밍량은 스크린 밖에서 이강생과 함께 〈당나라 승려〉, 〈떠돌이 개〉, 〈차이밍량의 영화관〉 등을 공연한다. “스크린이 바닥에 뚝 떨어져 있는 셈이다”⁸라는 차이밍량의 말처럼 〈당나라 승려〉는 《만주장정》 속 행자가 스크린 바깥으로 나와 공업화, 기업화, 공식화된 공연과 영화의 규율과 형식에서 벗어나 시간과 장소를 느리게 걷고 있다.



2. 도시 사이를 걷기

18세기 이후 기술발전이 가속화되며 대도시 공간이 탄생한다. 대도시는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로 끊임없이 그 폭을 확장한다. 짐멜은 「대도시와 정신적 삶」에서 대도시는 자연적인 삶이 사라지고 인공적인 문화와 기술, 노동 분화 등에 의해 개인적 삶이 위협받게 되고, 삶이 소비되는 경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고 보았다. 돈이 되는 것을 생산하기 위해 삶은 실용적으로 변해가고, 사물의 차이들은 무화된다. 소비에 익숙해진 대도시의 시민들의 감각은 둔해지고 이와 반대로 타인을 신중하게 생각하고, 이런 신중함은 혐오감으로 발전한다. 자연스레 타인과의 접촉은 꺼려지고, 온갖 삶을, 서비스를 구입하며 타인과 거리를 둔다. 광고는 기호와 감정을 사물처럼 소비하게 만든다. 도시와 도시 현실은 “소비 가능한 사물”로 간주되고, 장소를 기호와 가치로 인식하는 사람은 “순수한 기호의 소비자”⁹로 변모한다.

도시는 특정한 방법으로 규정되고 상상되는 공간이다. 또한 특정한 도시 공간의 모습을 욕망하며 소비하게 만드는 도시 이미지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같은 이미지를 가진 도시가 범람한다. 도시화는 특정한 곳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영역에 영향을 주는 전지구적 형상이 되었다. 르페브르는 이런 도시가, 물질적 존재가 아니라 이미지와 이데올로기라는 사회적 객체로서 계속 존재하는 것으로 보았다¹⁰. 또한 도시 이미지는 도시를 재현할 뿐만 아니라, 도시의 사람들의 관계와 감각까지 형성한다.

미셸 드 세르토는 권력의 언어가 ‘도시화’되며, “도시를 이데올로기화하는 담론 아래에서, 이해할 수 있는 정체성도 없고, 파악도 불가능하고, 합리적 투명성도 없고, 따라서 관리가 불가능한 힘들의 결합과 술책이 증식”한다고 본다. 전지적 시선의 권력 아래서 가독성이 넘치는 도시 속에, 도시의 일상적 실천가는 걷는 사람들이 되어 도시를 경험한다. 도시를 걷는 행위는 일종의 발화 행위가 되고, 걷는 행위로 도시를 말할 수 있다. 도시를 걷는 사람들의 발걸음은 무수히 많고 연속적인 배열을 이루지 않는다. 대신 걷기는 “자신이 ‘말하는’ 경로를 분명하게 표명하고, 수상히 여기고, 위태롭게 하고, 위반하고, 존중”¹¹한다. 사람들의 서로 다른 발걸음의 리듬에서 도시 계획/체계와 벗어나는 무수히 많은 의미와 방향이 개척된다. 발걸음은 공간의 표면을 해체하고, “도시계획에 따라 만들어진 도시 속에 ‘메타포’ 도시 혹은 이동 중인 도시”¹²를 만들어 낸다.

이렇듯 걷기라는 행위는 일상생활에서 늘상 일어나는 평범한 일이지만, 도시를 새롭게 상상하고 전유하는 실천으로 기능할 수 있다. 르페브르에게 일상생활은 다양한 형태의 소외로 황폐화되는 동시에, 소외된 인간성을 회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는 장, 즉 소외와 탈소외의 변증법이 일어날 수 있는 장이다. 다음 장에서는 차이밍량의 〈행자〉를 중심으로, 행자가 걷는 도시 공간과 그의 느린 걸음을 통해 도시 공간을 낯설게 보는 동시에 “현대 세계의 속도에 대한 저항”하는 감각적 장면을 어떻게 촬영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3. 〈행자〉, 도시의 리듬을 가로지르기

1) 도시의 리듬을 가로지르는 행자의 리듬

최초로 상영된 영화는 뤼미에르 형제의 〈공장을 나서는 노동자들(Workers Leaving the Factory)〉(1895)이다. 뤼미에르 형제는 공장을 나서는 노동자를 촬영한다. 외화면에서 화면(공장 안에서 공장 밖)으로 노동자가 등장하고, 화면에서 외화면(공장 앞에서 길거리로)으로 노동자가 퇴장한다. 최초의 영화를 보고 고정된 이미지가 움직일 수 있다는 것에 관객은 충격을 받았다. 하룬 파로키는 뤼미에르 형제의 〈공장을 나서는 노동자들〉을 〈110년 동안 공장을 나서는 노동자들〉, 〈노동의 싱글 숏(Labour in Single Shot)〉¹³에 재등장시킨다. 파로키는 영화의 최초 카메라는 공장을 나서는 노동자들을 향했지만, 지금의 영화는 공장을 향하지 않고, 공장 앞의 공간은 변두리에 남아 있다고 적는다. 일상의 평범한 노동(들)이 카메라에 담긴다.

차이밍량의 카메라는 홍콩 침사추이(尖沙咀)의 거리로 향한다. 침사추이는 구룡반도 남쪽 끝 지역으로, 홍콩의 큰 번화가 중 하나이다. 청나라 시절에는 작은 농어촌 마을이었다가, 1860년 아편전쟁 이후 베이징 조약으로 구룡반도는 영국의 땅이 된다. 영국인과 서양인이 드나들기 시작하며 침사추이는 도시화가 시작된다. 홍콩섬과 가깝고, 홍콩에서 가장 큰 쇼핑센터인 하버시티(海港城, Harbour City)가 있기 때문에 홍콩을 찾은 관광객들이 꼭 들르는 장소이다. 밤이 와도 불이 꺼지지 않는 도시, 행자는 대만의 타이베이(臺北)를 지나 침사추이의 거리를 걷는다.

첫 쇼트에서는 화면에서 외화면(계단에서 바깥)으로 걸어 나가는 행자의 뒷모습이 보인다. 행자는 느리게 발을 뗀다. 행자가 계단을 걸어 바깥으로 나가는 첫 쇼트는 약 2분간 지속된다(사진 1). 카메라는 고정된 채로 행자의 뒷모습을 계속해서 촬영한다. 화면의 가운데쯤 놓인 통로로는 바깥의 모습이 보인다. 앞으로 온갖 사람과 차가 지나 다닌다. 도로는 한 지점에서 다른 지점으로 향하는 궤도¹⁴이다. 한 곳에서 다른 한 곳으로 이동하는 도시의 모습이 보인다.

도시는 또한 소리를 낸다. 브레이크를 밟는 차의 소리, 수레 소리, 걷는 소리. 언뜻 보면 멈춘 듯 보이는 행자의 앞으로 수많은 소리가 지나간다. 도시의 소리와 이미지는 승려의 신체와는 정반대로 빠르게 흘러간다. 신체는 저마다의 리듬을 지닌다. 하지만 하나의 시공간에서 상호작용하며 영향을 받는다. 도시 역시 자신의 리듬을 지녔다. 도시를 잣는 “자본은 고유의 리듬을 지닌다. 자본은 (모든 것: 사물, 인간. 인민 등을) 생산하고, (전쟁, 진보, 발명과 갑작스러운 개입, 투기 등을 통해) 파괴”¹⁵한다. 자본은 삶의 시간 위에 세워지고 자리를 잡는다. 생산과 재생산은 도시의 리듬을 단조롭게 하고, 개인은 자신의 리듬을 잃어버린다. 차이밍량은 “영화는 시간의 여정을 보여주는 이미지”¹⁶라 말한다. 행자는 단조로운 리듬에 자신의 리듬을 끼워 넣는다. 일상적인 리듬에 혼란을 주며 시간의 흐름을 뒤튼다. 카메라는 멀찍이 거리를 두고 행자의 리듬을 관찰한다. 파로키가 뤼미에르 형제의 영화 문법을 따라 카메라를 고정시키고 노동하는 신체를 찍은 워크샵을 진행했듯, 차이밍량의 카메라도 땅에 발을 딛고 행자와 도시의 리듬을 동시에 촬영한다.

살아 있거나 살아 있지 않은 각각의 몸을 ‘교향악적으로’, ‘다리듬적으로’ 파악하게 될 것이다. 당신은 그것들을 그것의 시간-공간 속에서, 그것의 장소와 근접 미래 속에서, 집에서 거대한 건물들에 이르기까지, 도시와 거대한 풍경에 이르기까지 파악하게 될 것이다.¹⁷

히토 슈타이얼에 따르면 모든 접합(articulation)은 목소리, 이미지, 색채, 정념, 신조 등 다양한 요소들이 시공간상에서 편집된 몽타주이다. 항의를 위한 몽타주는 지금의 상태를 재생산하기 위해 노력하기보다 서로 다른 두 요소/이미지를 대립시키며 그 요소/이미지를 스스로 뛰어 넘는 바깥의 ‘그 무엇’을 생산한다. ‘타협을 재현하는 무언가’ 대신 또 다른 질서를 창출하는 몽타주는 서로 다른 두 요소/이미지를 끊임없이 맞부딪치며 어둠 속에 불꽃을 창조¹⁸한다. 붉은 옷을 입고 느리게 걷는 행자와 (대체로) 검은 옷을 입고 평상시의 속도로 걷는 행인이 한 화면에서 맞부딪치며 보이지 않는 불꽃을 창조해낸다. 도시의 소음, 일상 생활, 평상시에도 걸어가는 길. 몽타주는 랑시에르의 말마따나 이러한 모든 활동을 접속하는 실을 짠다. 또한 몽타주는 다수의 시간성을 하나의 시간적 흐름 안에 집어 넣는다.¹⁹

2) 광고, 소비, 시간의 이미지

발터 벤야민은 프랑스 파리의 뒷골목을 걸어 다니는 산책자의 위치에서 도시를 관찰하며 글을 쓴다. 『일방통행로』에서 벤야민은 간판, 광고, 벽보, 플랜카드, 주유소, 식당, 정류장, 병원, 가게, 맥주홀, 우표상 등 길을 걸으며 마주친 장소와 물건들을 묘사한다. 이 묘사들은 한군데 모여 잘 짜여진 커다란 도로가 아니라 벤야민이 걸었던 뒷골목처럼 복잡하게 늘어져 있다. 벤야민에게 대도시를 걷는 산책자는 우연한 사물을 마주하고 “일상적인 것을 꿰뚫어볼 수 없는 것으로, 그리고 꿰뚫어볼 수 없는 것을 일상적인 것으로 인식하는 변증법적 시각의 힘”²⁰을 얻는다. 이런 몽타주들을 벤야민은 숄렘에게 이렇게 설명한다.

내 아포리즘들은 독특한 조직 내지 구성을 이루어서, 팔라디오가 비첸차에 세운 거리라는 저 유명한 무대그림처럼 급격한 층위의 전경도가 펼쳐지는 거리가 되었어.²¹

이러한 도시의 전경도를 살필 수 있는 것이 바로 영화이다. 벤야민은 카메라가 도시 공간에 등장하며 도시의 파편과 카메라가 일상 생활을 비추고 알레고리적 의도를 실현한다고 보았다. 카메라가 현실의 요소를 원래의 맥락과 분리해 편집기술과 몽타주를 통해 새로운 구도 위에 놓으며 원래의 의미와는 다른 의미를 정립한다. 영화의 이미지는 시각적 보기의 대상이 아니라, 문자처럼 해독해야 할 알레고리가 된다. 카메라의 개입으로 대도시 경관은 집단이 공유하는 이미지 공간이 되고, 이로 인해 도시와 도시적 삶에 대한 묘사 가능성을 실현할 수 있는 해결책이 영화에게서 주어지게 된다.²² 벤야민은 억압된 육체의 눈이 의식적인 시선에서 벗어날 수 있어야 하는데, 벗어나는 역할을 해주는 것이 이러한 매체라고 보았다. 매체는 시각의 이데올로기에 묶여 있고, 아우라 속에 갇혀 있는 신체 감각을 내파하게 도와주는 것, 신체 감각을 해방시키는 요소²³를 지니고 있다. 영화는 도시 공간을 이미지로 제시하면서 도시를 낯설게 볼 수 있게 하는 알레고리의 장이 된다.

벤야민이 걸었던 ‘일방통행로’ 같이, 행자는 한 방향을 향해 계속해서 걷는다. 벤야민이 보았던 같은 간판, 광고, 벽보, 플랜카드 등을 느리게 걸어 지나친다. 건물의 외벽은 상품 이미지로 가득하고, 소비의 풍경을 행인들이 빠른 속도로 걸어가며 행자를 지나친다. 바닥만을 보고 걷는 행자의 시야에는 오직 바닥만이 보인다. 행자의 한 손에는 비닐봉지가, 다른 한 손에는 빵이 들려 있다. 이는 소비의 이미지와 생존의 이미지가 중첩되는 기호로 작동한다. 비닐봉지는 도시의 일상적인 소비 기호이다. 대량 생산된 상품을 손쉽게 옮기는 일회용 매개로, 자본주의 소비의 흔한 겉모습이다. 다른 손에 들고 있는 빵 역시 대량 생산된 상품 중 일부일지 모른다. 하지만 빵은 생존의 최소 단위로, 인간의 삶을 영위하는 데에 꼭 필요한 요소이다. 비닐봉지와 빵을 듣고 걷는 행위는 생존을 넘는 수행의 행위로 작동한다. 차이밍량은 이 사소한, 도시의 일부를 등장시키며 일상생활을 다르게 읽게 한다.

행자는 도시의 광고 사이를 걷는다. 쇼핑 센터의 계단, 번화한 도로의 횡단보도, 전차가 지나고 1년 365일을 위한다는 광고가 붙어 있는 밤거리, 네온 높은 빌딩 사이를 걷는다. 이러한 이미지의 모임은 일관된 내러티브나 의미로 수렴되지 않는다. 각각의 요소가 부딪치며 기존 도시 질서 위에 등장한다. 이질적인 시간성, 휘황한 도시의 이미지와 붉은 행자의 옷 등이 하나의 장면 안에 겹쳐진다. 이런 몽타주는 도시의 일상생활에 감춰진 리듬을 드러내고, 세계를 사유할 수 있는 다른 질서를 상상케 한다.

3) 구경꾼과 관객의 해방

차이밍량의 〈행자〉는 앞서 서술했듯, 홍콩의 침사추이 거리에서 촬영된다. 영화를 위해 거리를 통제하지 않고,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행인들 사이에 행자가 걸어가고, 카메라는 멀리서 행인과 차량, 도시의 광경 사이를 함께 촬영한다. 거리의 행인은 붉은 옷을 입고, 맨발에 고개를 숙인 채로 느리게 걷는 사람을 힐끗 쳐다보다 바쁘게 그를 지나친다. 잠시 길을 멈춰 행자가 걷는 모습을 바라보기도 하고, 행자는 수많은 사람이 지켜보는 와중에 느리게 걷는다.

이 장면들은 세 가지 시간을 접합시킨다. 영화 속 행자가 수행하며 걷는 세계, 그를 바라보는 도시 속의 구경꾼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벗어나 화면 바깥에서 20여 분이라는 러닝타임(running time) 동안 영화를 지켜보는 관객의 세계. 이 세 시간성은 하나의 공통 감각의 장에서 교차한다. ‘러닝타임’은 ‘연속되는’, ‘지속되는’이라는 뜻의 형용사 ‘running’과 시간(time)을 결합한 것이다. 영화의 길이를 나타내는 단순한 용어이지만, 〈행자〉에서 러닝 타임은 다르게 읽힐 수 있다. 행자의 느린 걸음은 영화의 러닝타임을 따라 계속해서 움직이고, 행인은 자신의 속도로 내화면을 지나치며, 관객은 20여 분 동안 스크린 앞에 앉아 그 시간 속에 임시적으로 경계 공간을 형성한다. 이는 단순한 관람을 넘는 공통적인 시간의 경험이 된다. 도시의 리듬, 행자의 이질적인 리듬, 그리고 가만히 스크린 앞에 앉아 행자의 걸음보다 더욱 더 느린 시간을 보내고 있는 관객의 신체가 교차하며 감각의 공통장을 형성한다. 일시적인 순간에서도 영화를 보는 이와 영화 속 행인/행자 사이, 카메라 자체에서도 이 공통장은 형성된다.

도시는 “온갖 유형, 온갖 계급의 사람들이 서로 싫어하고 적대하면서도 하나로 뒤섞여 끊임없이 변화하고 이동하는 삶을 살아가며 공유재를 생산하는 장”²⁴이다. 〈행자〉의 리듬 속에서 도시를 자기 방식대로 읽는 ‘해방된 관객’은 행위하는 자와 보는 자의 경계를 교란시킨 장에서 등장하는 관객이다. 이들은 관객이자 동시에 방문객이 되면서 감각적인 것의 나눔을 뒤엎는다. 관객은 능동적인 해석자 역할을 맡고, 이야기를 전유하기 위해 자신의 고유한 번역을 가다듬고 그 이야기를 자신의 이야기로 만든다. 이런 해방된 관객들의 해방된 공동체는 이야기꾼과 번역가의 공동체²⁵이다.

차이밍량 영화 속의 구경꾼과 영화 바깥의 관객은 이질적인 두 시간 속에 놓인 침사추이의 리듬과 행자의 리듬 사이에서 새로운 이미지를 발견한다. 이미지는 사람과 사물이 말하고 침묵하는 방식이 된다. “어떤 의미에서 이미지는 무언의 말[하기]로서 사물의 한복판에 거주”²⁶한다. 〈행자〉의 러닝타임 속 이미지는 서로 다른 리듬이 교차하며 형성되는 공통적인 시간의 장을 만들어낸다. 이미지는 그 자체로 “무언의 말하기”가 되며, 이 무언의 말하기는 신체에 직접적으로 기입된 의미를 드러낸다. 해방된 관객은 이 이미지들의 사이에 등장하고, 도시와 세계를 가로지르는 리듬을 사유하고, 다시 쓰는 번역의 방식으로 나타날 수 있다.

4) 입장 금지와 도주선 그리기

도시를 가로질러 행자는 어느 신문 보급소에 도착한다. 신문 보급소의 철제 셔터는 굳게 닫혀 있고, 위에는 ‘NO ENTRY’, 즉 ‘입장 금지’라는 말이 적혀 있다. 다음 쇼트에서 행자는 손에 쥐었던 빵을 느리게 먹는다. 행자가 빵을 먹는 순간, 이 영화에서 처음으로 일상의 소리가 소거되고 홍콩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허관걸의 음악이 흐른다. 노래 가사가 영화 화면에 나온다. 빵 하나도 몇 페니씩 하는데, 가진 게 없는 이들은 고통의 편에 서거나 행복의 편에 선다는 가사가 행자의 걸음을 대변하는 듯하다.

그녀는 그를 깊이 사랑한다/어떻게 이게 진실일 수 있을까?

어떻게 사랑이 깊을 수 있을까/그녀가 누더기 옷을 입었는데?

시냇물이 땅을 가르면/부유하지 않은 사람들은 고통의 편에 선다

부 없이는 모든 것이 꿈이다/그녀가 측은하다고 말하지 말라

빵 하나도 몇 페니씩 하는데/그녀가 숨만 쉬고 살 것이라 기대하지 말라

시냇물이 땅을 가르면/부유하지 않은 사람들은 행복의 편에 선다²⁷

차이밍량에게 옛 노래는 삶의 경험을 담아 보여주는 도구이다. 그는 〈행자〉를 홍콩 사람들에게 바치는 의미에서도 허관걸의 음악을 삽입한다. 이 음악은 단순히 배경으로 작동하는 것 뿐만 아니라, 〈행자〉 전체의 감각적 배치를 재구성하는 제3의 항으로도 작동한다. 사랑과 빵, 가난과 행복이 수행의 끝에서 조우하게 된다. 들뢰즈의 말처럼 이 장면은 기존의 두 선에 새로운 한 선분을 첨가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개의 선분으로 된 선의 한폭판에 또 다른 선을 그리는 행위이다. 도시의 리듬과 기호가 배치된 〈행자〉 끝에서 빵을 먹는 리듬, 노래의 가사, 신체의 정지 상태가 뒤섞이며 다른 흐름을 만들어낸다.

세속적인 활동은 새로운 감각을 직조하는 속에서 “공통 세계를 구성할 때 거치는 시적 차원을 획득”²⁸한다. 마지막 장면에서 영화는 다시 한번 현실과 삼장법사의 고행을 정지시키고 공통 세계를 구축한다. “버려진 도시의 주인이 되기 위해서, 도시의 문에 손을 대야 할까요, 아니면 멀리서 창을 던지는 것으로 충분할까요? 왜 어떤 경우에는 위에 있는 것이 아래 있는 것보다 우세하고, 다른 경우에는 그 반대일까요? (그러니) 실험하세요. 매번 관념들, 관계들, 상황들의 배치를. 매번 토지 소유주, 도둑, 창 던지는 사람, 맨손 뿐인 사람, 노동자, 화가가 개념들을 대신하는 진정한 소설을.”²⁹ 이런 들뢰즈의 말처럼 온갖 유형의, 온갖 계급의 사람이 뒤섞이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공통 세계를 〈행자〉의 이미지들은 실험한다. 도시가 규정한 경계의 끝, ‘입장 금지’ 앞에서 새로운 리듬이 등장한다.



3. 나가며

차이밍량의 〈행자〉는 ‘느린 영화(Slow Cinema)’³⁰로 정의된다. 느리게 진행되는 행자의 발걸음에서 ‘시간의 지속’이라는 관점으로 매체의 속성을 파악한다. 이 글에서는 느린 영화의 관점에서보다 도시의 리듬과 이미지의 차원에서 〈행자〉에 대해 살펴 보았다.

〈행자〉는 홍콩의 침사추이를 배경으로 걷는 행위만을 보여주는 영화이다. 걷기는 단순히 신체의 움직임을 넘어 도시의 리듬과 이미지에 개입한다. 드 세르토의 걷기처럼 〈행자〉는 무수히 많고 연속적인 배열을 이루지 않는 보행자들 사이에서 자신이 말하는 경로를 분명하게 표명하고 위반하고, 존중하며 공간의 표면을 해체한다. 이런 과정에서 도시 공간은 새로이 읽힐 가능성을 얻게 된다.

정치는 우리가 무엇을 보는지, 그 본 것에 대해 무엇을 말할 수 있는지, 보는 능력과 자질을 누가 말할 수 있는지, 공간의 속성과 시간의 가능태는 무엇인지를 대상³¹으로 한다. 영혼과 육체가 시공간을 점유하고 도시의 스펙터클한 이미지를 정지시키거나 교란시키는 공통적인 것의 무대를 구성한다. 이때 몽타주는 사유이미지로 작동한다. 사유이미지는 파편적이고 폭발적이며 중심을 뒤흔드는 힘을 부여한다. 도시의 이미지와 행인의 빠른 걸음, 그리고 지켜보는 관객의 시선이 프레임 안에서 공존한다. 유운성은 차이밍량의 〈떠도는 개〉를 설명하며 다음과 같이 적는다. “이제는 촬영되는 존재들이 프레임 안에 함께 있다는 사실이 아니라, 영화가 어떤 존재와 함께 잠시나마 무심한 우애 속에 있었다는 사실을 그 존재의 소소한 몸짓만으로 납득시키는 일이 중요하다. 비록 그 몸짓은 종종 지나치기 쉽고, 몽타주는 잠재적인 채로 남기 일쑤이며, 그 존재는 종종 거처가 없는 떠돌이이고, 영화가 과연 무엇인지 또한 불분명하지만 말이다.”³² 그의 말처럼 촬영된 존재들이 한 프레임 안에 존재하는 것을 넘어, 20여 분의 시간 속에서 서로 다른 리듬과 신체로 하나의 이미지 안에서 도주선을 그리며, 그것을 감각하는 관객의 신체와 매개될 때 구성되는 몽타주를 통해 무심한 우애의 장을 구성한다. 행자는 거처가 없는 떠돌이처럼 도시를 떠돌지만, 그의 느린 걸음은 일시적으로 도시 안에 거처를, 세 겹의 시간 안에서 구성한다.


“이 영화는 오직 걷는 것에 관한 것입니다.

그것 밖에 없어요. 그래도 보시겠습니까?”³³




  1. 프리드리히 횔덜린, ‘파트모스’, 프랑코 ‘비포’ 베라르디, “서문”, (히토 슈타이얼, 『스크린의 추방자들』, 김실비 옮김, 워크룸프레스, 2018에서 재인용). 13쪽.

  2. 리베카 솔닛, 『걷기의 인문학』, 김정아 옮김, 반비, 2017, 59쪽.

  3. 볼 수 있는 곳: https://vimeo.com/49339358

  4. 자크 랑시에르, 『이미지의 운명』, 김상운 옮김, 현실문화, 2014, 107쪽.

  5. 최병두. (2016). 한국의 자본축적 과정과 도시화: 도시 위기와 대안. 한국경제지리학회지, 19(3), 512-534.

  6. 전주국제영화제 편집, 『차이밍량 행자 연작』, 전주국제영화제, 2024, 87쪽.

  7. 〈무색(無色, No Form)〉(2012), 〈행자(行者, Walker)〉(2012), 〈금강경(金剛經, Diamond Sutra)〉(2012), 〈몽유(夢遊, Sleepwalk)〉(2012), 〈물 위 걷기(行在水上, Walking on Water)〉(2013), 〈서유(西遊, Journey to the West)〉(2014), 〈무무면(無無眠, No No Sleep)〉(2015), 〈모래(沙, Sand)〉(2018), 〈곳(何處, Where)〉(2022), 〈무소주(無所住, Adiding Nowhere)〉(2024).

  8. 송경원, “창작의 개념을 고민한다” 차이밍량 인터뷰, 씨네21, 2015,

https://cine21.com/news/view/?mag_id=81499, (2025년 6월 22일 접속)

  1. 앙리 르페브르. 『도시에 대한 권리』, 곽나연 옮김, 이숲, 2024, 133쪽.

  2. 박배균, 장진범. (2016). ‘강남 만들기’, ‘강남 따라하기’와 한국의 도시 이데올로기. 한국지역지리학회지, 22(2), 287-306.

  3. 미셸 드 세르토, 『일상의 발명』, 신지은 옮김, 문학동네, 2023, 202쪽.

  4. 같은 책, 217쪽.

  5. 노동의 싱글 숏은 뤼미에르 형제가 <공장을 나서는 노동자들>을 촬영했던 방식처럼, 카메라를 고정하고 촬영되었다. 17개의 도시에서 1~2분 길이의 싱글 숏 비디오를 제작하는 워크샵을 진행했다. (볼 수 있는 곳 : https://www.labour-in-a-single-shot.net/de/filme/)

  6. 자크 랑시에르, 『해방된 관객』, 양창렬 옮김, 현실문화, 2016, 177쪽.

  7. 앙리 르페브르, 『리듬분석』, 정기헌 옮김, 갈무리, 2013, 167쪽.

  8. 전주국제영화제 편집, 『차이밍량 행자 연작』, 전주국제영화제, 2024, 161쪽.

  9. 앙리 르페브르, 앞의 책, 127쪽.

  10. 히토 슈타이얼, 『스크린의 추방자들』, 김실비 옮김, 워크룸프레스, 2018, 123쪽.

  11. 자크 랑시에르, 『모던 타임스』, 양창렬 옮김, 현실문화A, 2018, 183쪽.

  12. 발터 벤야민,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폭력비판을 위하여/초현실주의 외』 최성만 옮김, 길, 2008, 163쪽.

  13. 윤미애, 『발터 벤야민과 도시산책자의 사유』, 문학동네, 2020, 28쪽에서 재인용.

  14. 같은 책, 189~191쪽.

  15. 김진영, 『희망은 과거에서 온다』, 포스트카드, 2019, 293쪽.

  16. 데이비드 하비, 『반란의 도시』, 한상연 옮김, 에이도스, 2014, 127쪽.

  17. 자크 랑시에르, 『해방된 관객』, 양창렬 옮김, 현실문화, 2016, 30-35쪽.

  18. 자크 랑시에르, 『이미지의 운명』, 김상운 옮김, 현실문화, 2014, 30쪽.

  19. She loves him deeply / How can this be true? / How can love be deep / when she’s dressed in rags? / If a stream divides the land / those without riches stand on the side of suffering / without wealth, all is but a dream / Don’t say thar she is pitiful / Even bread costs a few pennies a piece / Don’t expect her to live on air / If the stream divides the land, / those without riches stand on the side of happiness

  20. 자크 랑시에르, 『모던 타임스』, 양창렬 옮김, 현실문화A, 2018, 81쪽

  21. 질 들뢰즈, 클레르 파르네, 『디알로그』, 허희정, 전승화 옮김, 동문선, 2021, 109쪽.

  22. 이선주. (2022). 트랜스미디어로서의 슬로우 시네마 : 차이밍량의 <행자> 연작 이후 영화적인 것의 재배치. 아시아영화연구, 15(1), 351-383, 최수임. (2016). 차이밍량 ‘행자’ 시리즈에서의 시간에 관한 고찰. 씨네포럼,(23), 247-274.

  23. 자크 랑시에르, 앞의 책, 43쪽

  24. 유운성, 『유령과 파수꾼들』, 미디어버스, 2020, 153쪽.

  25. 전주국제영화제 편집, 『차이밍량 행자 연작』, 전주국제영화제, 2024, 11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