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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사각지대-2

2025. 4. 12.

많은 인간사는 오늘날 우리에게 단편으로, 더 큰 서사의 작은 부분이자 조각난 이야기들로 전해집니다. 실상 역사라는 것의 핵심 가치는 그런 것이겠죠. 행위(사건)의 총체가 아닌, 종종 왜곡되거나 잊혀지기도 하는 단편적인 이야기들의 모음인 것. 이 말은 방대한 진실을 나타내기도 하지만 책의 제본 역사를 훑어보면 그 ‘부분, 단편, 조각’들이 어떻게 방치되거나 파괴되고 보존되거나 또 다시 새로운 서사를 얻어 내는지 물리적으로 엿볼 수 있습니다.

책이 생산되고 유통되며 사라지는 과정에서, 책 안에 기록된 하나의 이야기가 시간을 통과하며 전쟁이나 화염, 침수나 노화, 방치의 사건들을 겪으며 조각나는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때로는 개인의 차원에서 책 내지의 소위 특별하고 예쁜 이미지들을 따로 소유하기 위해 잘려나간 종이 조각들이 생겨나기도 하고요. 이렇게 조각난 단편들은 훼손이 선행되어야 하지만 그 훼손의 방법론을 거쳐 훼손되지 않은 것들보다 더 오래 생존하기도 합니다.

인쇄술의 발달과 더불어 15세기 중반부터 서유럽의 독자들은 손으로 쓴 책보다 인쇄된 책을 더 많이 소비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제본업자들은 버려진 중세 원고를 분해하고 튼튼한 양피지 잎을 새로운 책을 만들기 위한 제본 재료로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수천 개의 원고들이 두 세기에 걸쳐 체계적으로 파괴되었고 잘려진 원고 조각들은 새로운 책의 커버로 쓰이거나, 책의 앞 뒷면을 보강하는 내지가 되거나, 책등을 단단하게 만들기 위해 덧대어지는 재료가 되었습니다. 또한 과거의 양피지는 현대에 쓰이는 종이보다 훨씬 더 질긴 조직을 가진 재료로, 잉크가 입혀진 부분을 긁어내고 새로운 텍스트를 기입하는 것 또한 가능했습니다. 그렇게 이 책에서 뜯겨진 조각이 저 책의 탄생을 위해 쓰이고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문장들이 쓰였던 종이는 당대에 전해야 될 이야기들을 적기 위해 재활용된 것이죠. 새롭게 직조된 조각들은 때로 변질되지만 비밀리에 살아남아 현대에 발견됩니다.

중세에 쓰인 책의 일부 페이지들은 16세기와 17세기의 인쇄된 책의 다섯 권 중 한 권에서 발견될 정도로 활발한 파괴와 재활용이 이루어졌고 이 잠입자들은 보통 숨겨져 있지만, 때때로 제본이 손상되었을 때 우리는 그들을 마주하게 됩니다.

이곳 두 번째 사각지대에서는 책등과 내지, 책의 커버등 육면체의 각기 다른 면과 구석들에서 숨겨진 이야기가 모습을 드러냅니다. 책등 보강을 위해 재활용된 원고의 조각에는 9세기에 쓰인 『요한복음』에 대한 주석이 포함되어 있거나 12세기에 쓰인 성경 조각이 발견됩니다. 약 300년 동안 다른 책등에 묶여 있었던 윌리엄 캑스턴William Caxton의 원고 조각 중 하나는 1476년 경에 인쇄되었던 종교 의식서로, 사제들의 성경 읽기와 영국 성인들의 종교적 축일에 맞춰 미사에서 입어야 할 의복을 안내하는 라틴어 텍스트였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어느 책의 속지에는 미사의 입당송(入堂頌, Introit)과 악보가 함께 수록된 단편 조각이 덧붙여져 있기도 하고, 18-19세기에 유래한 전례 텍스트(典禮, liturgical texts)가 쓰인 양피지 아래에는 또 다른 서사를 담은 텍스트가 이미 한차례 긁혀 나간 채로 희미하게 엿보입니다.

William Caxton은 영국 최초의 인쇄업자로, 인쇄술을 영국에 도입한 인물입니다. 1476년에 런던에 첫 인쇄소를 세웠고, 고전 작품의 영어 번역본을 대량으로 인쇄했습니다. 또한 Caxton은 영어로 된 성경 구절을 인쇄한 첫 번째 인물 중 하나로 자주 언급됩니다.

미사의 시작 때, 사제가 제대 앞으로 입장할 때 부르는 전례 성가

중세를 포함한 모든 책들은 그 내용이 더 이상 정확하지 않거나 유효하지 않을 때 그 몫을 다합니다. 그렇게 중세 말기와 19세기를 거치는 동안 수많은 원고가 찢어지고, 삶아지고, 불태워지고, 벗겨졌습니다. 이 고의적인 파괴를 거친 조각들은 오늘날 발견되고 보존되면서 다시 유효함을 획득합니다. 재활용의 사례를 거쳐 원고의 두 번째 수명이 탄생하는 것입니다. 책의 역사에 대해 알아갈수록 이 사물은 꽤 끈질기게 살아 남아 지식·연대·돌봄과 비밀을 전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책은 단순히 한 번의 사건을 담아내고 끝나기보다 가치를 잃거나 변형을 겪고 나서도 여전히 그 사물의 벌어진 틈을 통해 새로운 숨을 내보냅니다. 이토록 절멸하지 않는 책에 대한 믿음으로 글을 씁니다.


이미지 출처

Leiden University Library. Photograph: Erik Kwakkel Yale Law Library from New Haven, CT, USA - RL 46 L309s-2 Yale Law Library from New Haven, CT, USA - RB Y32 Hvi +1500 http://library.washu.edu/news/early-modern-pragmatism-medieval-manuscripts-as-binding-material/ http://library.washu.edu/news/early-modern-pragmatism-medieval-manuscripts-as-binding-materi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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